가정의 달 오월 그리고 어버이날이 다가오면 난 어머니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이 난다!
열여덟 곱디고운 나이에 이웃에 있는 두 살 연하인 철없었던 총각과 조부님과 외조부님의 약속에 의하여 부부의 연을 맺은 것이다. 결혼식 날까지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당일에서야 서로를 대면한, 지금 시대에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을 그런 결혼식이었다고 한다.
당시 농촌에서의 삶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피폐된 삶 자체였을 것이다. 어머님의 삶은 시부모님을 모신 가운데 어린 아들을 등에 업고 디딤방아로 쌀을 찧어 아궁이에 불을 지펴 손수 밥을 하셨고, 농번기엔 참을 나르시며 하루에 식사 준비를 다섯 번이나 하실 때도 있으셨다. 한겨울 꽁꽁 언 시냇가에서 얼음을 깨고 빨래를 하시면서 고된 시집살이를 하셨을 것이다. 식사 때는 밥상 위에 그릇도 올리지 않으시고 바닥에 둔 채 식사를 하셨으며, 고등어는 껍질이 더 맛있다고 하시면서 살코기와 좋은 것들은 시부모님과 남편 그리고 자식들을 위하여 내어주셨던 어머님의 마음을 철없었던 아들은 결혼 후에야 깨달았다.
어머니께서는 필자를 낳으시고 많이 아프셨다고 하셨다. 대대로 유교 집안이었기에 정화수를 떠다 장독대 위에 두고 달에게 소원을 빌기도 했으며, 굿판을 벌인 기억도 난다. 병원에 장기간 입원도 하셨지만 완치가 되지 않아 민간요법으로 온갖 조약을 사용했으나 효험이 없어 이웃에 계시는 권사님의 권유로 교회에 나가시게 되었다. 그때 이미 필자는 취학 전 동네 언덕 너머에 있는 교회에 나가고 있었고 어머니께서는 주일만 되면 아들이 안 보여 나중에 알고 보니 교회에 나가더라고 하셨다. 그렇게 어머님의 믿음 생활이 시작되면서 우리 집안에 대변혁이 일어나고 있었다. 큰집에서 관혼상제를 기독교 방식으로 하게 되니 삼촌과 당숙께서도 권유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교회를 다니면서 제사를 없애고 추모예배로 하는 등 전통적인 유교 집안에서 기독교 집안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어머님께서는 아픈 육신도 치료받고 마음에 평강도 얻으시며, 누구보다 더 열심히 주님을 섬기셨다. 채소나 과일 등 좋은 것이 있으면 어렵게 목회하시는 목사님에게 제일 먼저 드렸으며, 밤에 주무시기 전에는 혼자만의 기도실에서 찬송과 기도를 하시면서 22명이나 되는 아들과 자부 그리고 손자의 이름을 순서대로 일일이 부르면서 기도를 하셨다. 어머님의 간절한 눈물의 기도로 인하여 자손들은 어머님의 눈물의 기도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젊으셨던 시절에 잔병치레를 많이 하셨지만 주님을 영접하시면서 건강을 찾으셨던 어머니께서는 영원히 우리 곁에 계실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2009년 89세의 일기로 몸이 불편하셔서 병원에 입원하신 며칠 후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임종조차 지켜보지 못한 불효자가 된 지금 사랑만 받고 자란 눈물 상주 막내는 어머니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이 난다. 천국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잘 계실 줄 믿습니다.
이상호 장로
<대구내당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