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도 내가 고 3때 겪은 일이다. 제3대 대통령 부통령 선거가 있었다.
자유당 정·부통령 후보 이승만 이기붕,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 신익희 장면이었다.
이때 민주당 선거구호가 국민 실정에 맞는 명구호로 “못살겠다 갈아보자”였다.
자유당 대통령 후보 이승만<1875-1965>은 상해임시정부 내무총장 도산 안창호<1878-1938> 주선으로 임시정부 대통령에 취임해 곧 동지들과 갈등을 빚고 하와이로 망명후 조국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애국지사다. 발췌 개헌안으로 2대 대통령을 역임하고 사사오입 개헌안으로 3선 대통령으로 출마길이 열렸고, 초대 대통령에 한해 영구 출마할 수 있는 길도 열어 놓았다. 제헌 국회 의장으로 기독교입국론과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체제로 대한민국정부를 수립한 정치공로는 지금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당시 국회의장 이기붕 일파의 인의 장막에 휩싸여 경무대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당 독재자로 국민의 거센 비판을 받고 있었다. 이런 국민 분위기 속에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야당인 민주당 선거구호인 국민공감대를 이루는 “못살겠다 갈아보자”가 명구호였다. 여당인 자유당이 현상공모까지 하며 야당구호에 맞섰으나 “갈아봤자 별수없다 구관이 명관이다” 고작 이것이 여당 선거구호였다. 민주당은 1956년 5월 4일 한강백사장에서 트럭으로 마련한 연단에 올라 해공 신익희<1891-1956> 대통령 후보가 “못살겠다 갈아보자” 연제로 당시 30만 서울 시민 유권자를 사로잡았다. 그때 서울 시민은 150만이었다. 내각제 정치를 부르짖었다. 장면<1899-1966> 부통령 후보도 민주당 구호 중심으로 열변을 토했다. 신익희는 상해임시정부에서 외부 문부 일을 맡으며 안창호, 김구와 함께 독립운동 한 애국지사이다.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2대까지 국회의장을 역임했다. 장면 부통령 후보는 이승만 정부 초대 주미 한국대사를 지내며 6.25사변에 참전 16개국이 참전하는 외교활동에 큰 공을 이룬 정치인이다. 야당 정·부통령 후보 신익희 장면이 한강선거 유세 마친 다음날인 5월 5일에 호남선거 유세차 탄 호남선 열차안에서 이리역 도착 무렵 해공 신익희가 심장마비로 급서했다. 그날 비가 왔다. 신익희 유해가 서울역에 도착해 운구가 민주당 당원들에 의해 운구되는 모습을 남대문 전차역 전차 안에서 나는 창밖으로 잘 바라보았다. 신익희 유해 운구행렬은 경무대까지 진출해 민주당원과 학생들이 부상당한 사건도 일으켰다. 민주당은 다른 선거구호로 “요리조리 가지말고 신작로로 바로가자”고 외쳤고 내가 서울역 전차 안에서 “하늘에 해도 하나요 달도 하나요 이름도 하나인 장면을 부통령으로 보냅시다”라는 선거 선전말이 확성기 소리로 들려왔다. 선거결과는 야당으로 남은 진보당 대통령후보 조봉암<1898-1959>을 꺾고 자유당 후보 이승만이 큰 표차로 제3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국민은 부통령에 장면 박사를 당선시켜 주었다. 대통령은 여당 부통령은 야당으로 국민이 선거민심을 보여주었다. 사망했으나 40만표 추모표를 받은 해공 신익희가 살아 있었다면 이승만을 누르고 신익희 야당후보가 승리해 1956년도에 정권교체의 역사가 확립되었을 것이다. 이승만이 대통령될 운이 좋았다고 보는 여론이 많았다. 민주당은 4대 대통령 선거에도 “죽나사나 결판내자”는 선거구호로 조병옥<1894-1960> 박사를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으나 병치료차 도미한 미국에서 그 해 3월 15일 선거일 한달 앞두고 2월 15일 갑자기 별세했다. 이승만은 4선도 성공했으나 3.15 부정선거로 하야했다. 민주당의 명구호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해공 신익희 대통령 후보 급서로 그 비극이 지금도 안타까을 뿐이다. 오늘의 정치에 거울이 되길 빌어본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