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일반인을 대상으로 대중강연을 할 때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우리나라는 언제쯤 노벨상을 받을까요’ 라는 질문이었다. 사실 우리나라는 노벨상에 목말라 있다. 물론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는 하였으나 평화상은 정치적인 의미가 크기 때문에 진정한 노벨상이라고 여기지 않는 사람이 많다. 과학분야에서 실력으로 받는 노벨상을 진정으로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어느 최상위권 이공계 대학에는 캠퍼스에 빈 좌대를 설치하고 최초의 한국인 노벨상 수상자라고 이름 붙여 놓았다고 한다. 그만큼 우리나라 과학계와 일반 대중들의 노벨상에 대한 염원이 각별하다고 할 수 있다.
대중강연에서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필자는 “바로 그런 질문이 나오지 않을 때가 되어야 비로소 노벨상을 받게 되지 않을까요” 라고 반문하곤 하였다. 필자의 의도는 노벨상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 연구한다면 결코 노벨상을 받을 수 없고 그저 연구가 좋아서 즐겁게 연구할 때 그 결과로 노벨상은 주어지는 것임을 강조하려는 것이었다.
최근 허준이 교수가 수학분야의 노벨상이라 불리우는 필즈메달을 수상하였다는 소식이 일제히 일간신문의 머릿기사를 장식하였다. 우리나라가 그렇게도 애타게 기다리던 과학분야에서 드디어 최초로 노벨상급의 업적이 나왔다는 사실에 필자뿐 아니라 우리나라 모든 과학계 인사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린 것이 사실이다. 한국의 수학계 뿐 아니라 모든 학문분야를 통틀어 이만한 경사가 없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바로 얼마 전에는 반클라이번 콩쿠르 피아노부문에서 18세 소년 임윤찬 군의 우승소식이 우리를 놀라게 하였다. 이같이 지난 수년간 한류라는 이름으로 영화, 음악, 체육 등 문화 전반에 걸쳐 한국문화가 전 세계를 매혹시켜 왔는데, 유독 학술분야만큼은 한참 뒤처지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당혹감을 일거에 해소한 단비 같은 소식이 허준이 교수의 필드메달 수상 소식이었다.
사실 돌이켜 보면 학술분야도 한국문화의 세계적인 위상이 높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세계적인 수준에 오르게 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앞으로 물리학, 화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노벨상급의 업적이 쏟아져 나올 것을 기대해도 좋을 만큼 우리 학문이 열매 맺을 시기가 된 것이다.
그런데 예술과 체육분야와 달리 학문에서는 세계적인 업적이 이렇게 뒤늦은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나라처럼 교육열이 높고 학문을 존중하는 나라에서 유독 학술적인 발전이 늦은 이유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그 과도한 교육열 때문이라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창조적인 성취는 자유분방하게 개성을 마음껏 발휘할 때에만 가능한데, 사회적 성공이라는 획일적인 잣대로 학생을 내모는 부모의 교육열이 개성의 자유로운 발현을 가로막아 온 것이 아닐까. 학부모의 관심이 덜 미치는 예술과 체육분야에서 오히려 창의성이 발휘되어 세계적인 성취가 가능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피아니스트 임윤찬군의 예가 대표적이다. 자신은 산에 들어가 피아노만 치고 살면 좋겠는데 그렇게 해서는 먹고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콩쿠르에도 나왔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허준이 교수도 많은 방황 끝에 뒤늦게 자신 안에 있는 수학에 대한 열정을 발견하고 나서야 비로소 세계적인 업적을 낼 수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남과 비교하고 경쟁하며 상대적으로 더 나은 삶을 살려고 노력해왔다면, 이제는 자신의 정체성에 따라 자신만의 고유한 행복과 삶의 의미를 찾아가야 하지 않을까 한다.
김완진 장로
- 소망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