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거지 ‘널리널리’
거지는 광은네 단골손님
내강외유․온유겸손하신 어머니
어머니 가장 사랑하는 아들
엉뚱하고 유머러스한 장난끼
그 다음날부터 어린 형제 거지는 광은 소년의 집 단골손님이 되었다. 아들과 함께 셋이서 저녁을 먹게 상을 차려 주었다. 광은 소년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얼마 뒤 그 거지 고아 형제를 기를 사람이 나타나기까지 그들 셋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저녁 같은 상에서 밥을 먹었다.
광은 소년이 초등학교에 입학한 것은 그의 나이 일곱 살이 되던 1929년이었다. 그는 양시공립보통학교의 가장 나이 어린 학생이었다.
당시만 해도 졸업반인 6학년에는 아버지뻘이나 되는 연장자들도 많았다. 그런데 이 일곱 살짜리 귀염둥이는 쉬는 시간에 곧잘 6학년 교실로 침투하곤 하는 일이 많았다. 6학년 학생들이 공부에 열중해 있는 동안에 책상 밑으로 살살 기어다니면서 노는 것이 취미였다.
어느 날이었다. 그는 여느 때처럼 책상 밑을 기어다니면서 놀고 있는데, 갑자기 독한 가스 냄새가 코를 푹 찌르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는 얼굴을 찡그리고 크게 소리 질렀다. “탄산까스!” 교실 안에서 때 아닌 엉뚱한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6학년 학생들은 한바탕 웃었다. 그들은 광은 소년을 중심으로 빙 둘러서서 계속 웃었다. 그때부터 그는 학교에서나 마을에서 ‘탄산까스’ 별명으로 통하게 되었다.
그 무렵 “널리널리의 이야기”는 뒷날 그가 동화로도 쓴 바 있는 또 하나의 에피소드이다. ‘널리널리’란 여자 거지의 이름이다. 세수를 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 거지가 몇 살이나 되는지는 모른다. 양시 거리를 오락가락하며 밥을 얻어먹는 동안 그 여자에게 그런 야릇한 별명이 붙게 되었다.
추운 겨울날 밤이었다. 어머니는 물을 뜨러 부엌에 나갔다가 그만 소스라칠 듯이 놀랐다. 시커먼 물체가 아궁이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구요?” 그 시커먼 사람은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섰다. ‘널리널리’였다. “아이구 깜짝이야. 왜 아무 말도 없이 남의 집에 들어와 있는거요?” “들어와 있으라고 해서 들어와 있어요.” “아니, 누가 들어와 있으라고 했단 말이요.” “아드님이 춥겠다고 하면서 직접 안내해 주었는데…”
어머니는 더 할 말이 없었다. 보나 마나 광은이 한 짓이었다. 그 무렵에는 어머니도 아들 광은이 하는 일을 하도 많이 겪은 터라, 왜 거지만 보면 그렇게 도와주려 하느냐고 따지는 일 은 없어졌다. 그저 걱정이 있다면 아들이 자기 먹을 밥벌이나 할 수 있을지, 또 가정을 꾸려 나갈 능력이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그런 걱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들 광은이의 친구란 친구는 술집 아들, 홀아비의 아들, 가난한 집 아이 등 다른 아이들이 놀기를 꺼리는 그런 아이들뿐이었기 때문이다. 낳기는 아들 여덟을 낳았으나 넷이 죽고 이제 남은 것은 네 아들 태은, 광은, 정은(禎恩), 종은(宗恩). 그 중에서 둘째 광은은 몸이 약하여 감기 들기 일쑤였기 때문에 어머니는 둘째를 가장 사랑했다. 그러나 그래서만은 아니었다. 넷 가운데 가장 어머니의 마음에 들게 굴고 사랑스럽게 구는 것 은 둘째인 광은이었다. 이런 어머니에 대해서 광은은 뒷날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어머니 김도순 권사님은 내강외유하고 온유겸손하신 분이셨다. 어머니는 그 당시 거의 대부분의 여성이 그랬듯이 공부를 못 하신 분이었다. 그래서 밥을 지으면서 아궁이 앞에 앉아, 타다 남은 아궁이의 재를 끌어내어 놓고 부지깽이로 글공부를 하여 끝내 글을 익히시었다.
이런 어머니였기에 아들이 거지하고만 놀려 하는 데 대해 못 놀게 막지는 않았다. 체념한 듯한 마음으로 최대한 이해하려고 했다. 그런데 광은은 그 무렵 또 엉뚱한 짓을 저질렀다. 양시 거리의 모 장로님은 인색하기로 소문나 있었다. 돈을 절약하여 교회에 헌금하는 것까지 좋았으나, 혹 거지가 와서 밥 구걸이라도 하는 날에는 큰 난리가 벌어졌다.
“이놈, 밥이 없다는데 왜 또 왔어? 어서 썩 가지 못해?” 하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로 소문난 집이었다. 광은은 그 장로님 아들과 친구였다. 어느 날 두 소년은 거지로 분장했다. 옷과 얼굴에 검정을 잔뜩 칠하고 팔에는 깡통을 찼다. 그리고는 그 장로님 집을 찾아갔다. “먹다 남은 밥 좀 주세요.” 두 거지 소년은 대문을 삐걱 열면서 동냥을 했다. “없다. 가라!” 그 장로는 거지들을 자세히 보지도 않고 소리부터 빽 질렀다.
그러나 꼬마 거지들은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고 오히려 마당에 들어서면서 구성지게 ‘각설이타령’을 합창하는 것이 아닌가.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어얼씨구씨구 들어간다. 저얼씨구씨구 나가신다…” 그 장로는 마루에 있던 비를 들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그러나 꼬마 거지들은 여전히 꼼짝하지 않는다. 오히려 앞에 선 거지는 가냘픈 소리로 말하는 것이 아닌가. “장로님, 하나님이 내려다보십니다.” “뭐? 하나님이…” 그 때 뒤에 섰던 꼬마 거지가 썩 나서며 말했다. “저예요, 아버지. 이렇게 힘들어서야 어디 동냥이나 해먹겠어요?”
그 장로가 자세히 보니 뒤에 있는 꼬마는 틀림없는 자기 아들이었고, 앞에 있는 꼬마는 황 장로네 둘째 아들 광은임에 틀림없었다. 그 장로는 어이없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서 소리를 빽 질렀다. “이놈의 자식들, 나를 놀리는 거냐? 그래, 할 짓이 없어서 거지 노릇을 하고 있니?” “아버지와 어머니가 안 계시면 나도 거지가 될 것 아니예요? 그래서 미리 한번 시험해 본 거예요.” 아들의 대답이었다.
그 장로는 무척 화가 났으나 할 말이 없었다. (망할 놈들! 사람을 이렇게 망신시키다니!) 그 일이 있은 뒤부터 그 장로네는 양시 거리에서 거지에게 동냥을 제일 잘 주는 집이 되었다.
쟁개비 밴드부
황광은 목사의 그런 유머러스한 장난끼는 40대가 되어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다음 일은 필자가 직접 현장에 있으면서 본 일이다. 모임의 이름은 잊었으나 기독교 각계 명사들의 모임 이었다. 1968년도의 일로 기억한다.
그 모임에 강 모 장로님이 참석했다. 나이 60이 넘었고, 재력과 경력으로 해서 교계는 물론이려니와 사회에서도 알아 모시는 분이었다. 그 분은 모임에 참석하는 길로 황광은 목사의 모습을 보더니 다짜고짜 농담을 거셨다.
“누렁이, 복(伏)을 무사히 넘겼는가?” 해도 너무했다고 생각했다. 성이 황씨니까 우리네 토종개(土種犬)에다 비기는 것이 아닌가. 좌중에 한 바탕 웃음이 일었다. 황 목사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조용한 목소리로 받았다. “죄송합니다만 강 장로님의 어릴 적 아명(兒名)을 생각하면서 무더운 복을 즐겁게 넘겼습니다.” “뭐? 내 아명? 내게 아명이 있던가?” “본인께서도 잊으셨습니까? ‘아지’였던 것으로 듣고 있는데요.” 잠시 뒤에야 폭소가 터져 나왔다. 그러고 보니 ‘강아지’였다.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 전 장신대 학장
-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