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선생님은 세상사는 법을 가르쳐주지만, 교회 선생님은 영원히 사는 법을 가르쳐 주시므로 세상 선생님보다 더 존경하고 더 사랑하여야 한다. 예전 필자가 하였던 가르침이었다.
당시는 어른보다 아이들이 배는 더 많았다. 학교 문은 닫혀있고 친구의 손을 잡고 동생을 업고 많이들 모였다. 학년별로 남녀로 나뉘어 12반이니 교사는 턱없이 부족하여 합반으로 보완하여 갔다. 중학교(1961년도)에 입학하니 故박성동 전도사님이 서기로 임명하여 짧지 않은 교사생활이 시작되었다. 교회 내에서는 필자보다 1년 후배이면서 제자였다. 그들은 나를 선생님으로 불러주었다. 중고등학생은 몇 명 안되니 초등학교 졸업하면 청년회원, 그 이후는 남녀전도회원들이다. 그 기준이 결혼으로 삼았으니, 20대 남녀전도회원, 30대 청년회원도 있었던 아이러니도 있었다.
출신교회 성도들이 함께하여 예배드리고 교제의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나의 제의에 7월 9일 창립 70주년 기념으로 홈 커밍데이를 정하여 추진되었다.
예배와 교제와 식사는 더할 수 없는 큰 은혜였으며, 교회를 지키는 12명의 장로님들의 특별찬송은 교회는 우리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메시지였다.
흩어져있던 외지교인들과 본교회 성도, 목사, 장로, 권사, 사모, 집사 서로 부등켜안고. “야! 너! 형님! 언니! 오빠! 선생님!” 떠들고 반가웠다. 각자의 주어진 터전 위에서 열심히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음을 확인함에 감사를 드린다.
30년 전 청주행 직행버스에 오르니 한 뚱뚱한 중년 부인이 나를 보더니 껴안고 손을 잡고 뛰고 웃고 난리다. 사람들은 여인이 이상이 있는 줄 알고 안됐다는 표정이다. 함께 있던 딸을 부르더니 “엄마 주일학교 때 선생님이시다”라며 인사를 시킨다. 시집은 이천이고 충북대 다니는 딸과 고교생 아들이 자취하는 것을 돌본다는 것이다. “아~하 그러세요” 하며 밝게 웃는 딸의 그 모습이 옛날 엄마의 모습이다. 떠날 때에 기약을 하라는 것이다. 나는 무심코 10월 3일이면 옥산초등학교에서 총운동회를 하니 그때 보자고 하며 헤어졌다.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다. 나를 만나고자 저희끼리 연락하고 모이며 나를 찾더라는 동생의 증언이다. 미안한 마음과 함께 5~60년 전 그들에게 더 사랑하고 더 존경받아야 한다는 말이 새삼스럽다. 오늘 그 제자가 소천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먼저들 가서 계시게 우리 만날 그날까지.
주일학교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단다. 한국교회의 미래가 암담하다고 한다. 그럴수록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존경받는 교사가 되게 해달라고 매달렸던 그 기도가 지금도 열심을 다해 죽도록 충성하는 많은 주의 나라 세우는 교사들에게 축복이 임하시길 기도드린다. 또한, 교회들은 출신교회 교우들을 초청하여 그리스도 안에서의 깊은 형제의 정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이 크다.
김홍완 장로
<남이교회 은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