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고아들의 벗, 사랑과 청빈의 성직자 황광은  목사 (12) 불우한 이웃의 벗이던 소년 <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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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로 나날을 보내던 시절 ④

청빈으로 일생 지낸 프랜시스 동경

고아들 함께 헐벗고 굶주리며 10년

삼각산 ‘향린원’서 한영고 통학

고교 졸업까지 고아들과 함께해  

독서란 사실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닌 줄 안다. 등화가친(燈火可親)의 가을 긴긴 밤에 유유자적하게 책의 내용을 깊이 음미하며 재삼 탐독하는 여유가 있어야 독서이지, 나처럼 언더라인을 해가며 마치 현상붙은 오자(誤字)를 발견하려는 듯이 해서야 어디 독서겠느냐는 뉘우침이다.

결국 독서는 때와 곳을 가려서 계획적으로 설계된 스케줄에 따라 해야겠다고 생각해 보았다.

내 친구는 자기 아이들에게 우선 고등학교 졸업 전으로 200권을 읽히겠다고 벼르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고교까지의 읽어야 할 기초적인 것을 읽혀두면 다음은 전문 분야의 것을 읽게 되고, 또 장년이 되어서는 오락으로서의, 취미로서의 독서를 즐길 수 있으리라는 심산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읽어야 할 책을 읽어야 할 시간에 읽게 하는 것, 그것은 우리와 우리들의 자녀에게 독서를 씨름처럼 전쟁처럼 하지 않고도 될 수 있게 길을 열어주는 길이다.

독서란 시간이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있으면 분주하고, 분주하면 독서의 시간을 갖고 싶어지고, 그래서 인간은 모순 속에서 오늘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독서도 이러한 모순을 넘어갈 수 있도록 설계되고 계획되어야 할 것이다.

고아원 ‘향린원’ 선생님

1938년 이른봄, 광은 소년은 고향을 등지고 홀로 서울로 상경했다. 더 배워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이 열여섯 살의 까까머리 총각으로 서울에 닿기는 했으나, 우선 당장 몸담을 곳이 없었다. 그는 어디 고아원이 없는가 알아보았다. 거기서 침식 문제를 해결하고 야간학교로 진학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고아원을 찾게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가난한 사람의 벗이 되는 일이 좋기도 했으려니와 그 무렵에 성프랜시스의 생활을 한없이 동경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직 그리스도만 닮기 위해 부유한 집에서 뛰쳐나와 청빈(淸貧)으로 일생을 지낸 프랜시스는 광은의 온 마음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 프랜시스와 마찬가지로 자기도 일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리라고 그는 다짐하고 있었다.

서울의 향린원

삼각산 기슭에 ‘향린원’이라는 고아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광은은 즉시 향린원으로 찾아갔다. 원장은 방수원(方洙源) 선생이었다. 뒷날 자기가 창안한 물신으로 한강을 걸어 내려와 세인으로부터 기인이라 불리는 바로 그분이다. 광은은 향린원에 찾아가 아이들과 함께 살게 해달라고 부탁드렸다.

원장 방수원 선생은 이 엉뚱한 방문자가 마음에 드는지 광은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원장 부인은 무조건 거절하는 것이었다.

“당신 같은 학생은 지금 필요 없으니 가주시오.”

“우선 시험삼아 저를 일주일간만 써주십시오. 제가 마음에 안 드시면 일주일 뒤에 저는 아무 말 없이 떠나겠습니다.”

사흘이 되기도 전에 광은은 향린원의 고아들을 완전히 장악했다.

“광은 형, 광은 형!”

비록 일주일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 동안에 광은은 향린원의 200여 명 고아들의 참다운 형이 되었고 벗이 되었다. 굶주림과 질병과 외로움에 시달리는 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안겨준 것이다.

일주일 뒤 그는 다시 짐을 꾸렸다. 약속대로 향린원에서 나가기 위해서였다.

“형, 어디 가?” 원생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원장 부인이 달려와 말했다. “약을 올리기요? 가긴 어딜 가? 제발 있어줘요.” 이렇게 해서 시작된 향린원 생활이었다.

그는 밤이면 한영고등학교에 가서 공부했다. 삼각산 기슭에서 마장동까지 매일 걸어 다닌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고아들과의 향린원 생활이 한영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고아들과 함께 굶고 함께 헐벗으면서 베개 없이 잠자기를 10년 동안을 했다.

그동안에 그가 향린원에서 어떤 생활을 했는지 자세한 에피소드들은 알 길이 없다. 그저 자상한 성격과 재주있는 솜씨로 고아들의 참다운 친구가 되었으리라는 것을 미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는 뒷날 향린원 생활을 회상하면서 ‘푸트볼과 인생’이라는 미완(未完)의 글을 남겨 놓았다. 그 글에서 그 무렵의 그의 한 단면을 살필 수 있다.

그 아이는 봄에 지은 이름처럼 아름다웠다. 그 이름도 춘길(春吉)이, 그러니까 봄에 태어났길래 그런 이름도 붙여 주었겠는데 어째서 집에서 쫓아냈을까?

춘길이는 고아원에 들어오면서부터 마당 이 구석에서 저 구석까지 볼을 몰고 뛰는 것이 일과였고, 또 그때만이 춘길이의 아홉 살난 키가 열두살 나게 커 보이는 시간이었다.

“춘길아, 어서 들어와 저녁을 먹어라! 그리고 공부를 해야지. 안그래?”

춘길이에게는 아저씨보다도 더 반가운 음성이 되었고, 그렇게 부르는 김 선생도 춘길이를 그렇게 불러들일 때가 제일 행복한 음성-춘길이는 “네, 곧 들어가요”하고도 한 바퀴를 더 돌고 소매로 땀을 씻으며 김 선생님의 방, 아니 김 선생님의 방이자 자기 방인 일호실로 들어선다.

“시장하지? 어서 밥 먹어. 난 벌써 먹었다.”

춘길이에게 상을 내어 민 김 선생은 해가 다 넘어가기 전에 신문을 마저 훑어보려고 창가로 바싹 다가앉는다.

“선생님, 더 잡수세요. 같이 먹어요.”

춘길이는 아무래도 반찬이 너무 많이 남은 것을 느꼈기에 김 선생이 또 덜 잡수신 것을 알아차리고 그렇게 말했지만 김 선생은 대답이 없다.

아무리 어린 춘길이지만 그런 것쯤 다 안다. 일본 시대도 마지막 막바지라 한 달 배급 쌀은 한 주일도 못 가서 떨어져 버리면, 그 다음은 매일같이 메수수요 콩깨묵이요 어떤 때는 통밀을 삶아서 밥 대신 먹어야 했기에 200명 고아원 식구는 모두 구슬처럼 떼굴떼굴 구는 밀알을 하는 수없이 포켓 속에 넣고 다니며 왼종일 씹어야 하는 이때에 반찬은 더욱 모자라서 아예 한 사람이 양보를 해야 다른 한 사람이 입을 다셔보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춘길이는 소리없이 밥은 먹으면서도 김 선생님의 배에서 꾸룩 소리가 들리지나 않나 귀를 기울여 보았다. 차라리 좀더 일찍 들어올 것을- 이렇게 생각한 춘길이는 이제 한 주일밖에 안 남은 김 선생님 방에서의 생활을 해보는 것이다.

이 고아원에 새로 들어오는 아이는 누구나 두 주일을 김 선생과 한방에서 살게 되는 그 시간이 끝나면 본격적인 고아원 생활, 즉 아이들 방에 배치되어 함께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춘길이는 김 선생을 떨어질 날은, 또 김 선생도…….”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전 장신대 학장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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