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107회 총회에 거는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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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거룩한 사역을 논하고 결정하는 기구여서 성총회라 부른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성직자)의 모임이어서 성총회라 부른다.

성총회는 성별되어야 하고 성스럽게 모이고 진행되어야 한다. 총회를 보는 눈이 많다. 총회를 만드신 하나님이 보고 계시고, 전국 교회와 성도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주시하고 있다. 역시 기독교가 우월하고 탁월하다 라는 칭송사를 받아야 한다. 다른 집단과 다를 바 없는 미숙과 졸속을 드러낸다면 문을 잠그고 끼리끼리 둘러앉는 편이 훨씬 낫다.

총회를 향한 안과 밖의 기대치는 예상외로 높다. 그래서 신사도를 지켜야 하고 진행과 처리가 정도를 벗어나면 안 된다. 탈규범, 탈윤리, 탈신앙이 판치는 세상이지만 총회는 탈(脫)에 휩쓸리면 안 된다.

107회 총회에 거는 기대가 있다. 첫째,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한다. 바로크 시대 음악을 견인했던 바흐는 자신이 만든 곡 말미에 SDG라는 글자를 남기곤 했다. 그것은 Soli deo Gloria의 약자였다. 그는 자신의 곡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길 원했다. 개혁자 마틴 루터도 솔리 데오 글로리아를 내세웠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인 하나님의 종들이라면 우리 모두 하나님의 면전에 있음을 명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높여야 한다.

둘째,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 본 교단 총회는 면면히 지켜온 신앙과 전통이 있다. 그 전통이란 성경의 교훈을 따르는 것이고 교단이 정한 신앙과 신학의 정도를 지키는 것이다. 그 어떤 타협이나 혼합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따라 교회 공동체와 국가공동체를 치유하는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교회가 가는 곳에 국가가 간다. 교회의 잘못으로 국가가 걱정하는 것도, 국가의 간섭으로 교회가 어려움을 겪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총회 때문에 개교회가 어려움을 겪는 것도, 개교회 때문에 총회가 어려움을 겪는 것도 옳지 않다.

총회는 중량조절에도 신중해야 한다. 쉽게 결의하고 쉽게 파기하는 우를 범하면 안 된다. 총회의 결의는 존중돼야 하고 조변석개나 소탐대실로 먹칠하는 잘못을 피해야 한다. 그래야 정체성을 지키고 박수갈채를 받는 총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공명정대와 정도를 지켜야 한다. “혼자 가면 빨리 가고 함께 가면 멀리 간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함께 멀리 가려면 공명정대한 정도로 가야 한다. 총회 회무가 끝나면 모든 업무가 임원회로 이관된다. 임원회는 기관실과 같다. 기차가 선로를 이탈해 탈선한다면 큰일난다. 좌나 우로 치우치면 안 된다. 여호수아의 리더십은 좌나 우로 치우치지 않는 정도리더십이었다.

국론 분열로 나라가 몸살을 앓고 있다. 국론 분열의 원인제공자가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한 암울하고 아픈 역사는 치유될 수 없다. 

임원들은 일 년이면 끝난다는 단견을 버리고 견실한 집을 짓는 건축가의 자세로 임해야 한다.

107회 총회, 결코 짧은 역사가 아니다. 길고 긴 세월 동안 선진들과 선배들이 세우고 지켜나온 전통이 흔들리지 않도록 총대들 모두 힘을 모아야 한다.

한국교회는 문명충돌과 문화충격, 내우외환과 거센 도전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인구절벽으로 청소년은 줄고 초고령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거기다 코로나19의 긴 터널을 지나느라 지쳐있다. 일상이 무너지고 교회 회복의 속도가 느려지는가 하면 교인수가 줄고 있다. 

이쯤이면 비상체제를 선포하고 전략 짜기에 전념해야 한다. 불필요한 일로 힘을 소진할 때가 아니다. 이단 사이비는 극성을 부리고 세속문화는 젊은이들을 앗아가고 있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열리는 107회 총회는 의미도 깊고 책임도 크다. 단순 회무처리로 끝나선 안 되는 상황과 맞닥뜨리고 있다. 총회다움을 지키려면 바른 총대들이 될 때 가능하다. 107회 총회가 은혜로 열고 닫기를 기도하고 기대한다.

박종순 목사

<증경총회장, 충신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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