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헌(劉載獻) 목사는 ‘대한 임마누엘 수도원’이 ‘영계의 발전소’이며 ‘은혜의 수원지’가 될 것을 기대했다. “제단의 불은 결코 꺼뜨리지 마라!”는 구호 아래 불철주야 기도의 향불을 올렸다. 순회 전도대를 두어 부흥회, 전도회, 노방전도를 하도록 했다. 교역자나 평신도들이 영력이 쇠하여질 때 언제고 와서 수양하며 힘을 얻기를 바랬다. 그는 이러한 구국과 하나님 나라 건설에 대한 구체적이고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한국에서 최초의 개신교 수도원(修禱園)을 세워 그후 한국은 모든 기도원 운동의 원조요 모본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삼각산 임마누엘 수도원이 개원된지 두 달이 채 되기도 전에 1950년 6.25사변이 발발하고 만다. 6.25전에 이미 이북에서 수많은 성도들이 월남해 유재헌 목사의 집회에 참석하고자 삼각산에 운지해 있었다. 유재헌 목사는 그를 찾아온 이 피난민들과 계속 집회를 가지면서 주위 사람들의 권유를 마다하고 피난을 가지 않았다.
그는 차라리 그가 오랫동안 그처럼 소망하며 각오해 두었던 그 순교의 때가 드디어 임했음을 믿고 이제 그 죽음을 달게 감당하기를 선택했던 것 같다. 6.25 발발 2주 후인 7월 9일 그는 이렇게 노래로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나의 마음 정하였다. 아주 확정 되었다. 고생이나 죽음이나 달게 받아 가리라 나의 영은 깨었도다. 저와 수금도 깨라. 나는 어둔 이 새벽을 깨어 나가리로다” 그 후 이틀 후인 7월 11일 유재헌 목사는 ‘순교자의 깃발’이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찬송했다. “나의 살을 찢어 가라. 거룩한 피 흘리어, 주의 흔적 지고 가서 주님 얼굴 뵈련다/ 나의 뼈를 꺾어라. 육의 뼈는 꺾어도, 나의 신앙뼈까지는 꺾지 못할 것이다/나의 목을 잘라 가라. 순교자의 면류관, 나까지도 쓰고 가니 할렐루야 승리다/동족 위해 달게 죽자 불쌍한 죄인 구령 위하여, 주님 위해 달게 죽자 그 사랑 갚아 영광을 돌리자.” 남으로 미처 피란을 못간 많은 성도들이 삼각산으로 몰려와 유재헌 목사의 집회에 합세하게 된다. 그리하여 마치 엘리야의 제단과도 같이 기도의 향불이 보다 뜨겁게 타 올랐다. 그러나 8월 15일 정치보위부원들의 급습을 받게 된다.
어린 아이들과 늙은 부인들만 제외되고 유재헌 목사를 선두로 모든 성도들이 체포되어 정치보위부가 감옥으로 사용하던 국립도서관의 지하실에 감금되었다. 그후 부녀자들과 대부분의 성도들은 풀려나왔으나 유재헌 목사는 그곳에서 계속해서 수사와 고문을 받았다. 그는 9월 28일 수복전 공산군에 의해 납북되어 가던 중 탈진하고 지쳐 쓰러지자 총살당하고 만 것으로 추측된다. 경신 중·고등학교는 2015년 연세대학대강당에서 거행된 경신학교135주년 기념식전에서 명예졸업장과 함께 자랑스런 경신인상을 그 후손중 딸 유정심 사모(사위 천광)에게 수여했다.
김종희 목사
• 경신 중ㆍ고 전 교목실장
• 전 서울노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