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삶의 흔적(痕跡)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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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듬이질을 해본 적은 없어도 음악성이 있어서인지 대충 맞춰 두드렸었다. 뚜껑도 없는 손 다리미에 숯불을 담고 다리기 때문에 옷을 태울 것 같아 못하고 시어머님께서 치마를 다리실 때만 잡아 드렸었다. 처음에는 잡는 것도 어려워 놓치기를 잘 해서 실수도 했었다.

요리도 가르쳐 주셨다. 음식이 친정 어머님의 음식 솜씨와 다르기 때문에 배우는데 어려움이 많았다.(장 담기, 김치 담기, 약식, 식혜, 기타 재래음식들) 여름이면 저녁마다 칼국수를 드셨는데 밀가루에 콩가루 섞어 반죽해서 밀대로 밀기란 쉽지가 않았다. 그러나 시어머님께서 잘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음식 솜씨 좋다는 말도 들었던 것 같다.

바느질과 일들을 배우는 것보다 힘들어던 것은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시어머님께서 오해하시고 야단을 치실 때와 남편이 잘못한 것을 나를 불러놓고 야단을 치실 때, 그리고 식모까지도 나를 무시하고 자기 잘못한 것을 내게 씌워서 시어머님께 야단맞게 하는 일이었다. 친정에서 자라면서 부모님께 ‘아니요. 못해요’라는 대답을 하지 않고 자라고 시부모님께도 그렇게 해야만 되는 줄 알고 살았기 때문에 힘이 들었었다.

시아버님께서는 약주 드시고 실수하신 후 내게 한 번도 나무라신 일이 없었고, 무조건 나의 편이 되어 주셨으며 사랑해 주시고 믿어 주셨다. 시어머님께서는 야단치신 후 꼭 말씀하시기를 ‘어멈이 잘못해서 야단친 것이 아니다. 내가 신경질이 있어서 그런다. 이제 밥 먹어라. 밥 안 먹으면 젖이 나지 않는다’ 하시며 풀어 주셨다.

야단맞을 때는 속으로 울었으나, 풀어주실 때는 눈물이 펑펑 쏟아졌었다. 시어머님께서도 스트레스 때문에 어디에 풀 데가 없어 내게 하신 것 같았다.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시부모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었다고 생각을 한다.

남편은 논산 훈련소에서 훈련 끝나고도 계속 여러 교육과정을 지방에서 받았기 때문에 가끔 집에 왔었다. 교육이 끝난 후에도 철원 전방 근무를 하고 집에는 특별 외출 외에는 올 수가 없었다. 결혼 후에 신혼생활도 하지 못했고, 약 3년 동안 외출이 있을 때나 집에 올 수 있었다.

하나님 은혜로 춘천에 있는 2군단으로 발령을 받아 집에서 출퇴근하며 근무를 하게 되었다. 남편과 함께 생활하면 좋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힘든 일이 더 많아졌었다. 그런데 1년 후! 남편이 생각지도 못했던 육군사관학교 교수로 발령을 받았다. 그렇게 약 4년 동안의 시집살이를 마치고 선물로 받은 아들 둘과 함께 네식구가 분가를 해서 서울로 왔다.

시집에 살면서 터득한 것이 있다. 자식은 부모가 귀하게 여겨야 다른 사람들도 귀하게 여기고, 부모는 자식이 귀하게 여기고 효도하면 다른 사람들도 귀하게 여기고 존경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부모님의 은혜

시아버님께서 크게 실수하시던 날을 돌이켜보면 시아버님께서 집에 들어오시지도 않았는데 새 며느리가 이유가 어떠하던 불을 끄고 자고 있었고, 시어머님 방에도 시어머님이 잠든 사이 심부름하는 아이가 불을 끄고 잠이든 모양이었다. 온 집이 캄캄했으니 화가 나신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도 아버님께서는 취중에 실수하셨다는 생각 때문에 그 후로는 술도 적게 드셨고 차차 끊으셨다.

함명숙 권사

<남가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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