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인터뷰] 킨슬러재단 신영순·권오덕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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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장애인 돕는 일 킨슬러 가문에 맡기신 마지막 사명

북한 장애인들의 어머니, 수 킨슬러(Sue Kinsler, 신영순) 선교사

 

올해는 킨슬러 가문이 한국에서 선교 사역을 시작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이다. ‘킨슬러 선교사’가 아니라 ‘킨슬러 가문’이 라 칭하는 이유는 말 그대로 선교사 한 사람이 행한 일이 아니라 한 가문이 몇 대에 걸쳐 지속적이고 다양한 분야에서 오직 한 나라, 조선에서 선교사역을 펼쳤기 때문이다. 1922년 메리언 킨슬러가 미국 북장로교의 파송으로 처음 조선땅(서울)에 발을 내디딘 것을 시작으로, 이듬해 1923년 헬렌 킨슬러가 대구에서 여성교육과 전도부인들을 도왔고, 프랜시스 킨슬러(Francis Kinsler, 권세열)는 평양 숭실대학과 평양신학교에서 영어와 성경을 가르치고 1929년 불우 청소년들의 교육을 위한 성경구락부를 시작했다. 이들을 포함해 킨슬러 집안에서만 총 15명이 한국 선교사로 일할 만큼 킨슬러 사람들은 한국을 향한 애정이 깊었다.
권세열 선교사는 도로시 킨슬러와 1930년 평양에서 결혼해 아들 권오덕 선교사를 비롯한 세 자녀를 낳았으며, 권오덕 선교사 역시 한국에서 군선교, 산업선교 등으로 사역했다.
권오덕 선교사의 부인 신영순(Sue Kinsler) 선교사는 일찍부터 남한에서 장애인 사역을 펼쳤고, 이후 북한장애인들에게 “어머니”라 불리며 대북 장애인 사역을 20년 넘게 이어가고 있다.
“제가 미국 장로교 선교사로서는 이미 은퇴를 했는데 북한 장애인들이 제게 ‘어머니 역할에 은퇴가 어디 있느냐’면서 계속 여러 가지 일들을 요청해오고 있어서 이 일을 멈출 수가 없어요. 더욱이 내 형제이고 내 민족이니 이 사역을 다른 나라에 맡길 수도 없어요. 처음 제가 북한 장애인들을 만나고 돌아왔을 때부터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마음도 그것이었습니다. 북한 동포들을 외국인들이 구제하는 현실이 무척 마음 아팠어요.”
신영순 선교사는 1978년 권오덕 선교사가 전남 여수‧순천에서 사역할 때 선교사 사택 옆에 있던 ‘순천여수 애양재활기술원’에서 지체장애인들의 실습과 상담을 도왔다. 1991년부터는 장애인들이 일하며 머물 수 있는 ‘번동장애인보호작업장’을 마련해 원장으로 7년간 일했고 이후 북한 사역을 위해 운영을 온누리교회에 넘겼다.
신 선교사가 북한에 처음 방문했던 것은 1998년. 북한 식량난이 극심하던 시절 5천 명분의 결핵약 전달을 위해 유진벨 대표단 중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신 선교사는 그때 대북 지원 대부분이 외국으로부터 오는 것을 보고 정작 같은 동포인 우리나라에서 별다른 지원이 없다는 현실에 큰 아쉬움을 느꼈다. 2000년 미국 장로교 아시아 선교 담당 김인식 목사와 해외동포원호위원회로 다시 북한을 찾았을 때 신 선교사는 “우리가 한 민족이라는 동질감을 당장 느 낄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때 평양 육아원 지원이 시작됐고, 이후 2001년 세 번째 북한 방문에서 북측 해외동포원호위원회와 북한의 고아, 어린아이들의 건강 지원 협의를 하고 정기 방문의 길이 열렸다. 평양과 황해북도 사리원 지역 고아원을 돕게 됐고 2003년부터는 사리원에 콩우유공장과 빵공장을 세워 사리원 지역 5천여 명의 어린아이들에게 콩우유를 공급할 수 있게 됐다. 신 선교사는 보다 많은 우유와 빵을 정기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시부 권세열 선교사의 유산을 들여 2003년 3월 통일부 산하 사단법인 등대복지회를 설립해, 통일부 기금과 미국 장로교 교회, 한국교회들의 후원으로 북한 어린이를 위한 사역을 활발히 펼쳤다.

결국 ‘킨슬러’라는 이름으로 대북사역

등대복지회 실적은 대단했다. 설립되자마자 2003년 시각장애인 안과수술 및 진료를 위한 실로암이동진료차량을 평양 적십자병원에 기증, 2004년 평양 육아원과 애육원, 중등학원 생필품, 의약품 지원, 대동강 구역에 빵‧콩우유 공장 설립, 2005년 미국 선교회 후원으로 장애인 보장구 및 휠체어 지원과 더불어 각 도에 있는 농아학교와 맹학교 지원을 평양조선장애자보연맹과 합의, 2006년 평양 보통강 구역에 장애인직업재활을 돕는 ‘보통강종합편의’ 시설 지원 건립, 2007년 장애인예술단 조직에 필요한 물품 지원과 장애인들의 체육, 음악, 무용 훈련 시작, 같은 해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장애인아시안게임에 북측 장애자연맹대표단 4명의 경비 전액 지원 및 동행, 2008년 통일부 기금으로 북한 8개 특수학교와 육아원, 애육원, 중등학원 기숙사 건물 리모델링 등 지원, 사리원 평양 콩우유‧빵공장에 지속적으로 재료 지원, 2009년 남한 사랑의열매 기금으로 함경북도 회령산원에 의료장비와 의약품 등 지원, 2010년 중국 광저우아시안장애인올림픽에 조선장애자보호연맹 중앙위원회 임원 5명의 경비 일체 지원 및 동행.
그러나 한국과 미국, 그리고 북한을 오가며 후원을 요청하고 지원과 사업을 정신없이 진행하던 신영순 선교사는 은퇴 1년을 앞두고 돌연 등대복지회 상임이사직에서 해임당했다. 등대복지회 이사장을 맡고 있던 권오덕 선교사가 이사장직을 평양노회 J목사에게 위임하자 한달 후 J목사는 신 선교사의 상임이사 자격을 박탈했다. 신 선교사는 등대복지회가 지속적으로 대북 지원 사역을 이어갈 수 있도록 남은 1년 동안 잘 마무리하고 떠날 계획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달랐던 모양이다.
등대복지회에서 진행하던 모든 대북 사역은 신영순 선교사가 1998년부터 2002년까지 일 년에 6~7번씩 북한을 방문하며 고아들을 돌보고, 콩우유‧빵공장을 세우면서 쌓아온 신뢰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랬기에 등대복지회는 설립되자마자 통일부에서 가장 많은 기금을 받는 단체가 되기도 했다.
신 선교사는 북한 어린아이들과 장애인들을 차마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신 선교사의 황망한 사정을 아는 주변의 권유로 2010년 11월 통일부 산하 사단법인 ‘국제푸른나무’가 설립됐다. 북한 정부에서는 신영순 선교사가 장애인 돕는 일을 지속할 수 있도록 ‘민족장애인원아지원 협력사무소’ 공동소장으로 임명하고 사무소 마련도 허가했다.
“2012년 열렸던 세계장애인올림픽 출전을 위해 2011년 북한 장애인 체육선수 7명을 중국 베이징장애인올림픽촌에서 예비 훈련시키고 그중 수영선수 한 명은 독일 베를린으로 보내 와일드카드를 받는 성과를 냈지요. 2012년 8월 북한은 최초로 세계장애인올림픽 대회에 1명의 수영선수를 출전시켰어요. 기적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통역관으로 동행하며 북한 정부의 공식 허락으로 북측 대표단 24명과 함께 런던에 가서 모든 경비를 지원했고, 현지 교회와 교포들의 후원으로 세계장애인올림픽 참가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이후 2014년 인천 장애인아시안게임에서 북측 선수 26명이 내려와 탁구와 수영에서 은메달 2개와 동메달 2개를 획득했습니다. 2016년에도 세계리우장애인올림픽에 북한 선수 2명이 출전했었고 그때도 제가 준비부터 동행까지 함께 했습니다. 저는 미국 장로교 선교부에서 은퇴했지만 후원자들은 북한 장애인 사업의 중요성을 알고 후원을 계속해주고 계세요. 소중한 후원금이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는 북한 동포들을 위해 잘 사용될 수 있도록 제가 문지기 노릇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이 일을 멈출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2017년 3월 신영순 선교사는 킨슬러재단을 설립해 북한 장애인 사역을 계속하고 있다. 신 선교사의 자의는 아니었지만 결국 하나님은 ‘킨슬러’라는 이름으로 대북 사역을 이어가게 하셨다.
“성경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일을 했던 사람들 대부분이 가족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가진 것을 빼앗기고 감옥에 가고 매도 맞고 그랬는데, 저는 아직 매도 안 맞았고 감옥에도 안 갔더라고요. 배신은 성경에서 숱하게 나오는 이야기지요. 제가 돈을 벌거나 명예를 얻으려고 이 일을 시작한 게 아니라 불쌍한 영혼들 먹이고 입히고 고치는 데 통로 노릇을 했던 것뿐이잖아요. 그동안 제가 이 일에 사용 받은 것만도 감사해요. 소망이 끊어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던 시아버님께서 약 100년 전 평양 땅을 밟으시고는 ‘이 백성 어떡하나’ 하시며 아파하셨던 그 마음을 제가 이어받아 북한 땅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것이 또한 감사할 뿐입니다.”
코로나로 전 세계가 앓고 있던 지난해 신영순 선교사는 딸을 주님 곁으로 먼저 보내야 했다. 생후 3개월 때 고열로 뇌 손상을 입어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았던 아픈 딸이었다. 하지만 딸은 어려서부터 항상 행복한 웃음을 지어보여 주변에서는 ‘썬샤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또 신 선교사가 지금까지 장애인 돕는 일을 하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남과 북 장애인들을 돌볼 때마다 딸아이에게 하듯 하려고 했어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라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제가 행할 수 있도록 딸이 도와줬지요. 남과 북 장애인을 돕는 일을 지금까지 한다는 건 하나님께서 특별히 킨슬러 가문에게 맡기신 사명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고난이 와도 주님만 따르려 합니다.”
/한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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