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생적 신앙공동체’ 독립… ‘일본 한인교회’ 시작
‘예수교 회보’ 신문 첫 발행, ‘합일론’서 교회 단합 강조
한석진 목사는 간다(神田)에 가옥을 세내어 한국 YMCA 사무실 겸 예배당으로 사용하므로 일본 동경 YMCA에 더부살이로 있던 유학생의 ‘자생적 신앙공동체’를 독립시켰다. 이것이 ‘일본 한인교회’의 시작이었다. 1개월 약속했으나 3개월 후에야 귀국했다. 한 목사는 우에무라 목사와 친교를 맺고 지내면서 한 목사가 교역자 양성을 위하여 유능한 학생을 보내면 자기가 경영하는 신학사에서 공부하게 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귀국 후에 한 목사의 추천으로 이 신학교에 가서 공부한 사람들이 있었다.
한 목사는 신문사 창설에 필요한 1천 환 모금에 나섰고, 심혈을 기울인 결과 성공했다. 1910년 2월 28일 ‘예수교 회보’ 신문이 첫 호가 발행됐다. ‘예수교 회보’ 제1권에 발표된 수많은 사설 중에서 사장 한석진 목사의 뜻과 주체성을 가장 뚜렷하게 나타낸 것은 ‘합일론(合一論)’이었다. 그는 이 ‘합일론’에서 교회의 단합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 전년에 동경에 가서 일본 문부대신과의 면담에서 얻은 인상을 노골적으로 피력하기도 했다. “인간은 먼저 하나님과 합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리고 인간이 인간으로 더불어 합할 때 모든 일을 합리적으로 이루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합하지 못하면 변하여 고해가 되고 인간이 상, 중, 하 세 단계로 나눔으로 사람과 사람이 합하기 어렵다”고 했다.
상류는 권위를 중류는 보수에 몰두하며 하류는 낮은 처지에 골몰하여 어떤 이는 태평가를 부르며 또 어떤 이는 실망과 탄식이 그치지 않으므로 세상일의 흥망성쇠를 모르는 척하는 태도로 장차 패망에 이르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남녀 두 사람이 합쳐 일체가 됨 같이 하나님과 사람이 합하여 둘이 하나됨으로 무궁한 신비의 행복을 누릴 것을 기약하고 믿게 하는 것이 종교의 사명이요, 종교의 원칙이다. 천하의 이치가 합한즉 이롭다는 것은 이것을 말함이니 사람으로 합하는 동시에 하나님으로 더불어 합하기를 힘쓸 것”이라고 했다. 1911년 2월부터는 연동교회의 김종상이 총무가 되어 1914년 폐간될 때까지 계속 시무했다.
북촌 가까이 승동교회나 연동교회가 있어서 북촌의 양반들이 이미 그 교회에 상당수 출석했다. 신앙을 통한 민족운동이 두 교회에 나가는 인사들을 중심으로 여러 형태로 진행되고 있었기에 더 이상의 교회 설립이 시급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교회 설립을 추진한 것은 몇 가지 동기가 있었다.
첫째, 교회를 많이 설립하는 것이 민족 운동으로 생각했고, 둘째, 지리적 여건을 들 수 있었다. 셋째, 복음을 상류 계층인 양반에게 전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많이 사는 북촌에 교회 설립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연동교회는 양반 교인과 상민이 섞여 있었다. 승동 교회 형편도 비슷했다. 소실로 있는 여인들과 백정들이 많아서 ‘첩장 교회’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1909년 봄 완고한 양반들만 살고 있던 서울 북촌에 복음의 빛이 비쳐서 전도의 문이 열렸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