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處暑)만 지나고 나면 더위 걱정은 그다지 안 해도 된다. 조석(朝夕)으로 부는 바람이 가을을 살갑게 느끼게 한다. 이제 가을은 머언 콩밭짬에 왔나보다. 그토록 숨 막히는 더위였는데 그것이 이렇게 싹 가시다니 새삼 자연의 섭리가 놀랍고 신기하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사람의 마음도 조금씩 바뀌는 모양이다. 가을은 사람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게 한다던데, 필자의 경우는 꼭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되레 어디에라도 훨훨 길을 떠나 보고 싶고 무언가 할 일이 남아 있는 듯, 그런 빚진 마음이니 어인 일일까.
집 안에서는 집 밖을 그리고, 집 밖에서는 집 안을 그리는 야릇한 마음이다. 황혼이 깔릴 무렵이면 한산하던 거리가 제법 붐빈다. 집이 있어 집으로 가는 사람들, 집으로 돌아오는 가장을 기다리는 가족들로 활기가 돈다.
집집마다 하나 둘 불이 켜지고 조용하던 가정마다 웃음소리가 들린다. 우리네 인생이 가는 길에는 예측 밖의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그 길에는 창조주의 계획과 섭리로 이루어 지리라 생각된다.
필자는 한 평생 방송인이 되어 한국의 모든 방송이 순기능으로 질을 높여 삶에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여 온 국민이 가족과 함께 웃다가 편히 잠들게 하는 방송이 되도록 보람있고 후회없는 젊음을 거기다 바쳤다. 다시 태어나도 가고싶은 그길로 인도하신 창조주께 감사의 정 금할 수 없으며 돌아보면 오직 하늘의 은총으로 감사뿐이다.
창밖에 작열하던 여름이 서서히 물러가고 초가을의 문턱에서 맑은 햇살이 화사하게 퍼져 내리고 있다. 필자는 지금 내집 안방에 조용히 앉아 이 시론을 쓰고 있다. 그러면 되었지 않느냐? 그러면 흡족하지 않느냐? 그런데 필자는 내집에 있으면서도 무언가 할 일이 남아 바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왔으니 살아 왔던 아름다운 흔적을 무엇인가 남겨 놓아야 한다는 채무자의 생각 때문이다.
우리네 인생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정녕 나그네가 아닌가? 학교 숙제를 끝내지 못한 학생 기분으로 뭔가를 해야 하고 뭔가를 남겨야 하는 숙명의 바랑, 괴나리봇짐을 저마다 힘겹게 등에 지고, 한 평생이 다하는 그 날까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존재가 아닌가? 필자는 인생 2막을 감히 수필가로 시인으로 살아왔으니 가슴 조용히 휘젓는 시와 수필을 남겨야 하지 않느냐고 자문자답해 본다.
가을이 가까이 오고 있다. 필자가 여든네 번째로 맞이하는 가을이다. 해마다 오는 가을이지만 해마다 조금씩 다른 느낌을 안겨다 주면서 이번 가을도 저만치에 오고 있다. 나는 비록 빈손으로 왔다 해도 무엇인가 남기고 가야 한다는 채무자로서 강박관념 같은 꿈을 꾸며 인생을 오늘도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다.
노도(怒濤)가 없는 바다는 바다가 아니며 위험이 따르지 않는 산도 산이 아니듯이 거절을 모르는 신(神), 원하는 대로 베푸시는 하나님이라면 사람은 설산 꼭대기에까지 기도의 제단을 쌓지는 않으리라. 사랑할수록 사랑하고 기도할수록 기도하는 정진, 그리고 인생사 아픔 가운데 아픔을 배우고 슬픔 가운데 해탈의 의지를 더 기르게 될 능력의 창달(暢達)을 간절히 꿈을 꾸어본다. 문득 공초(空超)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나 여기에 적어본다. “꿈속에 꿈을 꾸니 꿈 깨어도 꿈이로다” 기왕 인생이 한바탕 꿈일 바에야 싱싱한 젊음들의 희망에 찬 푸른 꿈처럼 노상 그렇게 신나고 보람된 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기에 결실, 충만, 보람 등의 상징성을 지니는 한편 가을은 여름날의 무성했던 만물과 산과 들이 쇠락해 가는 계절로 소멸, 이별, 상실, 외로움, 쓸쓸함 등의 음울한 이미지로도 오고 있어 인생 나그네의 무상함을 깨닫게 하는 계절이다.
이 좋은 계절에 내 스스로 지난 세월을 뒤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갈 이정표를 살피면서 그리 길지 않게 남은 나의 날들을 심오한 통찰력과 생생한 묘사를 담아 시와 수필로 한참 세월이 흐른 뒤에 만고에 길이 남을 불멸의 명작을 오늘도 감히 꿈꾸어본다.
여기 김영랑의 시 ‘오- 매 단풍들겄네’와 필자의 시 ‘가을 연가’로 글을 맺는다.
“오- 매 단풍들겄네/장광에 골붙은 감잎 날러오와/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오- 매 단풍들겄네//
추석이 내일모래 기둘리니/ 바람이 자지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오- 매 단풍들것네/”
어느 울적한 가을날!/나는 너의 한 생애/추억의 고운 주단을/꽃보다 진한 한평생 영화를/이렇게 가볍게/밟고있다//
초록빛 물 올라/정갈한 바람/삼복의 함초록 젖은땀 식히고/칠팔월 불볕/짙게 그늘 지워/호막한 대지 식히고//
세월 다해 이제 가는길/드믄새 드믄새/하늬바람 타고 호리호리 내려와/햇살덮고 딩굴다/한줌 재로 조용히 흙으로 묻힌다/이게 한뉘 숙명 이런가//
침묵의 진혼곡/거기 바스러지는 너의 혼백/가이없이 장엄하고/허기사 언젠가 그날이 오면/우리 또한 가랑잎 낙엽인 것을/나는 예서 미리 보고 서 있노라//
표천 오성건 장로
<송정교회,한국장로문인협회 전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