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막염에 걸린 시골 할아버지를 치료했던 그해의 일로 기억한다. 하루는 3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부인이 배가 몹시 아프다며 병원을 찾았다. 배는 부어올라 있었고 구토를 했다. 아픈지 사흘 만에 병원에 왔다고 했다. 진단 결과 장폐색(腸閉塞, iestinal costruction)이었다. 장이 어떤 이유로 꼬이거나 막힌 것이다. 바로 수술을 하기로 했다.
수술실에 환자를 눕혀 놓고 입에 마취기를 대려는 순간, 수술실 간호사가 황급히 나를 가로막았다.
“그 마취기 쓰지 마세요! 어제 그걸 쓰다가 환자가 죽을 뻔했어요.”
당시 그 병원에는 마취 전문의가 없었고 마취 기술을 연마하려는 직원도 없었다. 그래서 의사가 직접 마취를 한 다음 수술을 해야 했다. 그런데 워낙 기계가 노후되어 수술을 하던 도중에 문제가 생겼던 모양이었다. 할 수 없이 구식 마취법을 쓰기로 했다. 쇠로 촘촘하게 만든 그물망 마스크를 환자의 입에 밀착시키고, 그 위에 에테르라는 구식 마취약을 떨어뜨리는 마스크 마취법이다. 나는 큰 주사기에 마취약을 넣어 한두 방울씩 떨어뜨렸다. 그렇게 해서 환자가 마취되었고 나는 간호사에게 혈압과 맥박이 얼마인지 수시로 물어보며 수술을 했다. 이것은 선진국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구식 마취법으로, 오지가 아니라면 결코 사용하지 않았을 아주 위험한 방법이다.
만약 마취 상태에서 음식물이나 역류한 소화액이 폐에 조금이라도 들어가면 ‘흡입성 폐렴’에 걸리게 되어 폐가 순식간에 손상되고 사망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현대의 의료 현장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확률은 거의 없다. 하지만 선교 현장과 같은 오지에서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임상에서 거의 볼 수 없는, 의학 교과서에서도 희귀한 사례로 나오는 환자들을 의외로 쉽게 만날 수 있다. 나는 막힌 창자를 뚫는 수술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복부를 꿰매기 시작했다. 마지막 한두 바늘 꿰매면 수술은 끝이 날 무렵이었다. 갑자기 환자가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그 짧은 순간에 환자가 한 번이라도 숨을 들이킨다면 구토한 오물이 폐로 들어갈 것이었다. 놀란 나는 즉시 석션(suction, 수술할 때 나오는 각종 액체를 빨아들이는 기구)을 환자의 목구멍에 들이밀었다. 급히 빨아들인다고 서둘렀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간신히 수술을 끝내고 마무리 처치를 한 다음 간호사에게 이런저런 오더(order)를 내리고 계속 관찰하도록 주문했다. 그런데 그날 밤 10시경 환자의 상태가 갑자기 나빠지면서 맥박이 빨라지고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밤 12시, 흉부 사진을 찍어보니 염려했던 흡입성 폐렴이 양쪽 폐에 생긴 것이 뚜렷하게 보였다. 벌써 폐의 절반가량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아이고, 이 환자는 이제 죽었구나!’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미국이나 한국의 큰 병원에서라면 비록 가능성이 없어도 수술을 시도해볼 것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고름덩어리가 된 환자의 폐를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었다. 낙심이 되어 온몸이 땅 밑으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런 와중에 극심한 육체적 피로까지 몰려왔다. 마지막 순간에 구토를 하는 환자에게 석션을 하느라 몹시 지친 나는 눈을 좀 붙이려고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그런데 잠시 후 눈이 떠졌다. 아직 새벽이었다. 나는 환자의 상태가 궁금해서 병실로 뛰어갔다. 환자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호흡이 힘들어 가슴은 오르락내리락 들썩이고 의식은 전혀 없었다. 환자의 몸에 산소가 부족했지만 산소를 주입할 기계도 없었다. 쇼크 상태라 수축기 혈압은 60, 맥박은 130을 가리키고 있었다. 죽음의 문턱에 선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때 기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병원의 조용한 곳을 찾아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이 부르셔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면서 처음부터 차근차근 아뢰기 시작했다. ‘하나님, 저 환자를 제발 살려주십시오. 제 능력 밖의 일이오니 주님이 저 생명을 구해주십시오.’ 간절히 기도했다.
얼마가 지났을까. 창밖이 환해진 것 같았고, 사람들의 분주한 움직임도 느껴졌다. 시계를 보니 기도를 시작한 지 세 시간 반이 지나 아침이 되었다.
‘아이쿠! 그 사이 환자가 죽지 않았나?’ 급히 회복실로 갔다. 가만히 병실 유리창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상하게 환자의 가슴 부분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서야 나는 뛰어 들어갔다. 내 눈앞에 놀라운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숨이 가빠 헐떡이던 환자가 눈이 초롱초롱하고 뺨이 발그스레한 게 완전히 소생한 것이 아닌가! 혈압도 정상이고 맥박도 충실히 잘 뛰었다. “지금 어떻습니까?” 환자에게 물었다. “네, 아주 좋아요.” 나는 환자의 손목을 만져보았다. 강한 박동에 얼마나 감격하고 감동했는지 모른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의 탄성이 절로 나왔다. 아무 처치도 하지 않았는데 내가 기도하는 3시간 반 사이에 환자 폐의 죽었던 세포가 생명의 세포로 바뀐 것이다. 의학적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고 있어서 내가 그 기도의 은혜를 입고 있구나!’
내가 기도를 많이 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기도한 중보자들의 기도의 열매임을 느꼈다. 선교 사역은 하나님의 일이요,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는 현장임을 또 한 번 경험했다.
한번은 포카라 INF 컴파운드(compound, 구내)를 걸어가는데, 컴파운드 호스트로 일한 지 25년이 넘은 영국에서 온 밀 할머니와 그녀의 친구로 보이는 또 다른 할머니를 만났다. 나는 낯선 할머니에게 인사를 했다.
“존강 선교사 맞지요?” 나는 초면인데 그 할머니는 나를 아는 듯했다. “어? 저를 어떻게 아세요?” “영국에 있는 우리 기도 그룹 리스트에 당신의 사진이 있습니다.” 한국과 미국에서 많은 분들이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은 알았지만 영국에서까지 기도하는 줄은 몰랐다. 그 말을 듣고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바울도 선교 보고를 할 때 ‘나를 위해 기도해달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하나님은 중보자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죽었던 사람에게 새생명을 주신 것이다. 선교에 있어 중보기도는 정말 중요하다. 후원하는 분들은 때로 ‘내가 기도하고 선교 헌금 내고 하는 게 얼마나 효과가 있나?’ 궁금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다가 자칫 선교 사역에 무관심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틀림없이 기도는 효과가 있다. 있는 정도가 아니라 가장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