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선천 복음화와 민족 교육의 주역 양전백 목사 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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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옥 후 계속 학생 YMCA 운동서 지도력 발휘

양 목사의 솔직한 고백 들은 교인들 눈물로 통곡

평안북도 선천군 목사 양전백의 통신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선천읍은 칠백여 호 되는 곳인데 복음이 전파된 지 십팔 년에 교회가 왕성하여 외촌에 지회로 나눈 곳이 십오 처요, 읍 중 교회를 남북 양 당회를 만들고 새로 큰 예배당을 짓기로 하여 지금 연보한 것이 금화 이천삼백여 원인데 금년 봄으로 건축하고자 하는데 염려하는 것은 교인의 열정은 대단한데 재정이 부족하여 거대한 집을 감당치 못할까 하니 이 통신을 보시는 형제자매는 기쁨으로 풍부하신 주께 기도하시어 은혜 위에 은혜를 더 받게 하심을 바랍니다.”

또 정주군 박규현의 통신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정주읍교회가 세워진 지 십여 년에 교우가 삼백 명에 지나지 않더니, 금번 부흥회 때 믿은 사람이 이백팔십여 명으로 주일을 성실히 지킬 뿐 아니라, 매 주일 삼사십 명씩 새로 작정하고 믿음으로 지금은 교인 수가 일천여 명이 되어 주일 공부를 십팔 장소에서 하니 감사함을 다 말할 수 없다. 정주 덕달면 조촌은 본래 양반촌이라 사부들이 많이 살기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작은 서울이라 하더니, 오늘에는 이 촌 중 이백여 명 교인이 한 가지로 예배하니 이전 작은 서울이 변하여 작은 천국을 이뤘다. 할 만한지라 대저 하나님의 권능이 저 양반들을 이기셨으니 할렐루야 그뿐 아니라 해읍 남면 부호 백촌은 유명한 사부촌인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사모 뿔이 서로 걸려 다닐 수 없다’ 하던 곳이 지금은 그 어리석은 풍속이 변하고 믿는 이 삼십여 명이 모여 진실한 마음으로 예배하고 있다.”

양전백 목사는 신성학교 YMCA 창설자이자 학생 YMCA 하령회 주임 강사였으므로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몰리게 됐고, 1910년과 1911년 여름 두 차례에 걸친 학생 YMCA 하령 회를 통해 양 목사는 당시 황성 기독교청년회 부회장이던 윤치호, 이상재, 이승만, 에디(G. S. Eddy), 화이트(G. C. White), 와이어(H. H. Wire), 브룩크만 (F. M. Brukman), 질레트(P. L. Gillett) 등과 함께 학생 YMCA 회원들을 지도했는데 이것이 일제에 눈엣가시였다. 

당시 일제는 1910년부터 국내 모든 민간단체를 해산시켰는데 유독 YMCA만 끝까지 남아 항일운동을 계속했기에 최후의 탄압을 가했다. 이처럼 양전백 목사는 목회자였을 뿐 아니라 학생 YMCA 운동의 개척자이자 항일 투사였기에 3년간 투옥되었으나, 출옥 후 계속 학생 YMCA 운동에서 지도력을 발휘했다.

다시 강단에 선 양전백 목사는 맨 먼저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나는 이제 교직을 그만두어야 되겠습니다. 연약한 육신으로 인해 나는 수감 중 고문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거짓말을 했으니 주의 교단에 설 수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는 양전백 목사의 솔직한 고백이었다. 

이 고백을 들은 교인들은 모두 눈물로 통곡했다. 그동안 목자 잃은 양처럼 남쪽 하늘만 바라보며 그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도했던 교인들이었다. 양전백 목사의 솔직한 고백으로 성도들의 온 마음이 다시 그에게로 돌아왔다. “목사님처럼 양심적인 분이 또 어디 있습니까?” 모두 그 사임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소리쳤다. 결국 양전백은 다시 목회자로 돌아왔다. 1914년 양전백은 평북 노회장이 됐고, 1916년에는 제5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제1회 졸업생 중에서 제일 먼저 총회장으로 선출됐다. 그는 온화한 인품과 특유한 감화력으로 교계를 이끌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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