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전라도가 고향이지요 – 미국 내슈빌에서 일어난 사건 (2)

Google+ LinkedIn Katalk +

어려서부터 촉망받는 인물… 한국 선교에 대한 열망

저 북방 얼음 산과 또 대양 산호섬 

저 남방 모든 나라 수많은 백성들

큰 죄악 범한 민족 다 구원 얻으려

참 빛을 받은 우리 곧 오라 부른다(찬 273장)

어느덧 테이트는 시카고에 있는 맥코믹신학교로 돌아왔고 그 이후부터 계속 한국 선교사로 갈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리고 만나는 신학생들마다 그들에게 한국 선교사로 갈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한편 비록 무명의 신학생이 제출하였지만 미국 남장로교 해외 선교부에서는 그냥 묵살할 수가 없어서 실행위원회를 소집하였다. 실무자는 실행위원회 자리에서 그때 일어났던 사건에 대해서 자세하게 보고하고, 한국 선교 지원서를 보여 주었다. 부장은 실무자의 보고를 다 청취한 후 여러 위원들의 의견을 물었다. “부장님, 한국이 어디에 있는 나라입니까?”

“한국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여 있는 조그마한 나라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에서 파송한 언더우드 선교사가 활동하고 있는 지역이며, 이미 미국 북장로교에서 여러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성공적으로 선교 사역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부장의 자세한 보고가 있었지만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부에서는 우선 한국에 파송할 만한 재정적인 뒷받침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더욱이 한국을 자세하게 아는 위원이 한 사람도 없어서 결국 부결되고 말았다.

한편 매일같이 기도하고 있던 테이트는 기숙사와 교실을 오고 가면서 혹시라도 선교사로 나갈 준비를 하라고 하는 서신이 오지 않았을까 하여 하루에도 여러 차례 우편함을 뒤져 보곤 하였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어느 날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부란 발송지가 적힌 서신이 왔다. 이때 테이트는 떨리는 마음으로 그 서신을 뜯어 보았지만 내용은 간단했다.

테이트 신학생.

우리 해외선교부 실행위원회에서는 장시간 그 문제를 놓고 회의를 하였지만, 재정적인 문제도 있고 한국에 대해서 모두들 모르기 때문에 학생이 다른 나라로 지원하면 적극 검토하여 선교사로 파송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테이트는 이 서신을 받은 즉시 그 우편함 곁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하늘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순간 그의 귓전에 이런 말이 스치고 지나갔다.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그런데 뜻하지 않게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부로부터 한국 선교에 대한 통지를 받게 되었다. 이때 테이트는 몇 번이고 자신의 눈을 의심하면서 통지를 훑어 보았다. 확실하게 선교사로 선발되었다는 글귀가 역력하게 그리고 또렷또렷하게 담겨져 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두 손을 높이 들고 몇 번이고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표시로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세 번 외치고는 그 자리에 엎드려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한참 동안 기도한 후 눈을 떴을 때 이미 해는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으며, 저녁 노을은 그렇게 장엄할 수가 없었다. 보통 저녁 노을은 잠깐 머물다가 곧 없어져 버리지만 이날따라 저녁 노을은 장시간 계속되고 있었다. 참으로 장엄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테이트는 기숙사에 돌아와서 만나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야, 나 한국 선교사로 가게 되었다. 위해서 기도를 부탁한다.” “야, 한국이 도대체 어떤 나라야?”

물론 당연한 질문이었다. 더구나 미국의 한 주보다도 작은 나라이기에 이름을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후 테이트는 매일같이 한국 선교에 대한 설계도를 만들었고 이 소식을 부모님이 살고 있는 미주리 주에 알려야 한다면서 간단한 책가방 한 개를 챙겨들고 고향으로 달려갔다.

테이트는 미주리 주에 도착하자마자 부모님에게 달려가서 밑도 끝도 없이 이렇게 말했다.

“저, 이제 한국 선교사로 가게 되었습니다.”

“아니, 한국이란 나라가 어디에 있기에 그렇게 좋아하느냐.”

원래 테이트는 남을 도와 주는 일을 어려서부터 행동으로 보여준 사람이었기에 언젠가는 큰 일을 해내리라는 것이 부모들의 생각이었다.

야 이놈아! 1년만 참으면 의사가 되는데

테이트는 단 하루도 집에 머물지 않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한국 선교사로 나가게 되었다면서 기도의 요청을 하였다. 그의 주변 사람들도 테이트의 성격이 적극적이고 남자다운 기질이 있어서 언젠가는 훌륭한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모두들 생각하였다. 

테이트는 1862년 9월 28일 미주리 주에 있는 켈론웨이에서 출생하였다. 이미 그는 부모의 손에 이끌려 동네에 있는 가까운 교회에 다니면서 성장하였다. 그는 마을에 있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를 차례로 다니면서 공부를 하였으며, 고등학교 졸업 후 진학 문제로 남다른 고민에 빠지기도 하였다.

부모는 테이트가 법대에 진학하여 법률을 공부해서 판·검사가 되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러나 테이트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어려서부터 남을 돕는 일이라면 자신의 것을 손해 보면서까지 했던 그는 어떤 권력이나 명예보다도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쪽을 훨씬 좋아했다. 그래서 그는 의과대학에 진학하여 훌륭한 의사가 되어 가난한 환자를 돌보는 일이 가장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폴턴에 있는 웨스트민스터대학 의학부에 진학을 하였다.

사실 테이트는 의학부에 지원서를 제출해 놓고 시험에 합격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 해 따라 많은 학생들이 의학부에 진학하기를 원해서 대학 입학 응시자가 많았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합격하자 그는 혼자서 몇 번이고 만세를 부르면서 부모님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어느덧 웨스트민스터대학 의학부에서 의사로서의 자격을 갖추며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의사가 되는 일을 포기하고 말았다.

“야 이놈아! 이제 1년만 더 공부하면 의사가 될 수 있는데 그만 두다니 빨리 와서 1년만 더 하고 의사로서 훌륭하게 남을 위해서 살아라.” 

“아버님, 아닙니다. 저는 신학을 해서 해외에 나가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겠습니다.”

얼마 동안 부자간의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그러나 테이트의 아버지도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기에 더 이상 만류하지 못하고 신학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돕기 시작하였다.

왜 테이트가 의사가 되는 길을 포기하고 선교사가 되겠다고 했을까. 그가 폴턴에서 교회에 다니고 있었는데, 어느 날 유명한 부흥사가 폴턴 지방에 와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있었다. 그는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찬송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테이트는 자신도 모르게 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때 그는 부흥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가 교회당 안 깊숙이 파고 들어갔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