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의 길] 내 교회·내 성도는 목양의 기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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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대학을 졸업한 후 5년간의 직장생활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1996년, 서른세 살의 나이에 신학을 시작했다. 모태신앙인으로 태어난 필자가 어린 시절에 목회자가 되겠다고 서원했던 것에 대한 순종이었다. 누구라도 가던 길을 돌이켜서 주의 종이 된다는 것은 그리 만만치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 길은 기쁨과 설렘의 연속이었다.

 모교회에서 전도사로 있으면서 주일학교와 중고등부 사역에 열중했다. 동네마다 돌면서 승합차로 아이들을 실어날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쳤다. 아이들의 숫자는 점점 불어났고, 그 아이들이 지금은 모두 교회의 중직자들이 되었다. 유아세례를 받았던 모교회에서 교사와 전도사로, 그리고 부목사로 섬기는 동안 설교할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너무나 설교를 하고 싶었던 필자는 결국 목사 안수를 받은 지 3개월만에 김포 읍내에 교회를 개척했다. 창문도 없는 상가 지하실을 얻어서 베니어로 한쪽을 막아 사택으로 쓰고, 나머지 공간을 예배실로 꾸몄다. 모교회 창고에 있던 십자가 하나랑 작은 강대상 하나를 얻어서 개척교회를 시작한 것이었다. 그 흔한 장의자도 없이 바닥에 장판을 깔고, 방석 몇 개를 내놓은 것이 전부였다. 감사하게도 모교회 집사님 한 분이 중고 앰프를 마련해 주셔서 교회에서 마이크 소리가 울리게 되었다.

 예배 시간엔 동네 아이들 몇 명이 예배당을 마구 뛰어다녔고, 지적장애를 가진 청년과 두어 명의 교인들이 앉아서 설교를 듣고 있었다. 그래도 행복했다. 내 교회가 생겼고, 내 교인이 있다는 것이 너무나 기뻤다. 그때 설교는 지금 설교에 비하면 두 배는 길었다. 그래도 아무도 지루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말씀을 전하면서 신이 나있는 내가 신기했는지 듣는 성도들도 졸지 않고 잘 들어주었다.

 지적장애를 가진 청년이 가출을 하면 수소문을 해서 쫓아다녀야 했고, 짓궂은 아이들이 말썽을 부리면 뒷수습을 하느라 애를 쓰면서도 전혀 힘들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들이 내 교회에 있어 주는 것이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들어오는 헌금이 없으니, 사례비는 당연히 없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보여주시는 곳이라 믿었기에 필자는 매주 20kg의 쌀을 소포장으로 나누어 담아서 몇 안 되는 교인들과 거리로 나가서 ‘사랑의 쌀 나눔’ 행사를 시작했다. 성경 속 만나는 매일 내렸지만, 우리 교회는 신기하게도 어디선가 20kg의 쌀이 매주 들어왔다. 그때만 해도 교인들이 없으니 바쁠 일이 없었다. 시간은 많고, 할 일은 기도 뿐인지라, 하릴없이 교회 바닥에 엎드려서 기도를 시작했다.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고, 1주일 2주일이 지나더니, 엉겁결에 40일 금식기도를 그렇게 마쳤다.

 목회자로서의 첫 발을 내딛었던 지하실 개척교회는 눈물이 절반이었고, 기도가 절반이었다. 내 교회를 주신 하나님, 내 성도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어설프게 시작했던 개척교회 목회가 지금까지도 가장 아름답고 가장 충실했던 축복의 시간으로 남아있다.

조한우 목사

<주평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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