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인쇄물… 장로, 집사들에 나눠 줘 거사 계획
이눌서 선교사와 전주 신흥학교
이눌서 선교사는 서울과 전주를 오르내리면서 바쁘게 생활했다. 그는 원래 어학에 재능이 있어서 성서를 한글로 번역하는 데 가장 적임자로 여겨졌다. 전주에 머무는 동안에는 선교 사역보다 성서 번역에 치중하였으며, 역시 상경하면 서울에 있는 성서 번역위원들과의 회의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때마침 하위렴 선교사의 노력으로 김창국이란 어린 소년이 병으로부터 고침을 받고 그 즉시 하위렴 선교사의 사환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 평일에는 그를 계속해서 사환으로서 시킬 만한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전주선교부에서는 1900년 9월 9일 이눌서 선교사 사랑방에서 김창국 학생 1명으로 학당을 열었다. 그후 학생들이 모여들자 교사도 필요하게 되었다. 신흥 90년사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00년에 김창국 1인으로 시작하여 1901년 8인의 학생으로 발족한 학당은 1904년 가을에 전주군 이동면 화산리 서완재로 이전하고 공부를 가르치니 당시 학생은 10여 명이었고, 선생은 선교사 하위렴 씨 부인과 최중진, 김필수, 김명식 등 5명이었다. 그후 1906년 봄에 희연당 옛터에 기와집 한 채를 지어 이전하니 학생 수는 증가하여 55명이 되었다. 이때 필수과목은 국문, 한문, 성경, 역사, 습자, 체조, 창가, 도화 등으로 초등학교의 과정이었다.”
초창기의 신흥학교는 보잘 것 없었지만, 그러나 전주선교부에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그것은 학교를 통해 복음을 확산시키는 일이었다. 이러한 뜻이 확고하자 미국 선교본부에서는 교육을 전담할 선교사를 파송하였는데 1907년 3월 니스벳(John S. Nisbet, 한국명: 유서백, 이하 유서백으로 표기) 선교사 등 다수의 인력이 보충되었다. 이때 학생이 점점 많아지자, 1908년 하위렴 선교사 주택 기와집을 수리하여 학교다운 시설을 갖추고 교육을 실시하였다. 다시 기와집 8칸을 새로 건축하고 유서백 선교사를 설립자 겸 교장으로 추대하였다. 학교 명칭은 새로운 여명을 연다는 뜻으로 전주 신흥학교라고 하였다.
“1909년 학부 대신 이재곤으로 부터 사립 신흥학교로 인가를 얻었고, 동년 6월 15일에는 보통과 제1회 졸업생 5명을 배출하였다. 그 해 한국 선교의 후원자인 그래햄(L. E. Graham) 씨가 1만 달러를 기부하여 가을에 희연당의 유적지에다 벽돌 양옥 2층으로 80평을 건축하고 고등과 학생을 모집하여 가르쳤다. 당시 학생 수는 고등과와 보통과를 합하여 150명이나 되었다.”
민족의 요람지 전주 신흥학교
문자 그대로 새로운 여명기를 맞이한 전주 신흥학교는 해가 거듭될수록 계속 발전되었다. 1910년에는 새 건물에서 14명의 보통과 2회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며, 그동안 학교 발전에 공이 컸던 유서백 선교사는 목포 영흥학교 교장으로, 유서백 선교사의 부인은 목포 정명여학교로 부임했다.
유서백 교장 후임으로 이눌서 선교사가 잠시 교장의 직무를 맡았지만 그도 성서 번역일로 곧 사표를 제출하고 제4대 교장으로 에버솔 (F. M. Eversole, 한국명: 여보솔, 이하 여보솔로 표기) 선교사가 취임하였다.
“1914년 봄에 나는 모교인 신흥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교장선생님인 여보솔 목사님은 독일계 미국인 선교사였는데 나를 물리와 수학 교사로 임명하였다. 여 교장은 남달리 공학에 관심이 있는 분으로서 내가 학생 시절의 유 교장과는 달리 학생들에게 이공 계통을 강조하였다. (중략) 어느 날 총독부의 고위층에 있는 일인 한 사람이 순시차 학교를 방문하였다. 교직원 일동이 한 자리에 모여서 이 일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좌담회를 가진 일이 있다. 좌담회 용어는 일본어로 이야기하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앞자리에 앉아 한국어로 이야기하고 질의하였다. 이때 일인은 일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힐난하였다. 선생님께서는 왜 국어를 사용하지 않느냐고 말하고 있을 때, 나도 지금 국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말하자 일인 장학관은 그 길로 나가 여 교장에게 항의했던 소동이 있었다.”
이러한 일을 당했던 당시 과학 교사는 송철로서 1912년 신흥학교 고등과 1회 졸업생이다. 그는 군산 영명학교 교사로 잠시 재직하다가 중국 상해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당시 신흥학교는 항상 애국열에 불타 있었으며, 이러한 의식을 가진 것은 모두 성서에서 배운 선민사상에서 표출되었다. 그래서 재학하고 있던 학생들은 민족을 항상 우선으로 하는 생각을 갖고 공부에 임하였으며, 이러한 분위기는 1919년 3·1운동시 전주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편, 서울에서도 암암리에 이 운동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전북 지방에서도 미션학교와 교회를 중심으로 준비하였다. 그리고 전주선교부에서 운영하고 있는 전주 고등성경학교에서도 이 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1919년 2월 하순에 서문밖교회에서 매년 열리는 충청도와 전북 도내의 장로, 집사들의 성경학교를 마치게 되었다. 이날 선교사 마로덕 목사를 통하여 미리 김중곤의 집에서 만들어 둔 태극기와 인쇄물을 각 교회에서 모여든 약 300여 명의 장로와 집사들에게 나누어 주고, 장날을 택하여 거사하도록 지시하였다.” (1919. 3. 14. 전북 매일신문)
한편 전주 기전여학교 출신인 임영신은 당시 충청남도 천안에 있는 대양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해 있을 때 서울에 있는 함태영 목사에게서 전주 지방에서도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명령을 받고 전주로 왔다.
그런가 하면, 이미 신흥학교 교사들은 공립학교 교사들과는 의식이 전혀 달랐다. 교사들은 교실에 들어가면 민족의 독립에 대해서 외치기도 하였으며, 교사 중 유병민은 1919년 1월 고종 황제의 국상을 맞자 건을 가지고 와서 학생들 앞에서 서울 쪽을 바라보며 대성통곡을 했던 일도 있었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