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근대 문단의 거목이었던 춘원 이광수는 본래 동학에 심취해 있었다. 그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1907년 메이지학원(明治學院)에 입학하였는데, 이때 친구의 권유로 기독교 신앙에 입문하게 된다. 이광수는 1910년에 조선에 건너와 남강 이승훈이 설립한 오산학교의 교사가 되면서 기독교 신앙을 더 가까이 접하게 되었다.
이광수는 기독교에 대한 애정은 가지고 있었으나 신앙인은 아니었다. 그는 여러 번 기독교에 대한 글을 실었는데, 처음에 긍정으로 시작한 글은 차츰 기독교에 대한 비판의 글로 바뀌었다. 그는 조선의 기독교가 당시 가장 조직적이고 단결된 사상적 집단이라고 진단했으며, ‘불교의 조선’이 ‘유교의 조선’이 되었듯이 머지않아 ‘유교의 조선’이 ‘기독교의 조선’이 될 것을 예언하기도 했다. 그는 1917년 7월에 기고한 ‘야소교의 조선에 준 영향’이라는 글에서 기독교를 암흑 속의 조선에 신문명의 서광을 비춘 은인이라고 극찬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에 기고한 ‘금일 조선야소교회의 결점’에서는 지식인의 눈으로 기독교의 신앙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① “제일은 계급적이외다.” 동양의 계급사상을 기독교가 타파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목사와 장로는 언제나 보통교인의 위에 서려한다는 비판이다. ② “제이는 교회지상주의외다.” 그 결과 기독교는 교회와 세상을 너무 심하게 구별하고, 세상 학문을 천하게 여기고, 종교 이외의 일을 천시하고, 종교적 의무 이외에 여러 의무를 소홀히 한다는 비판이다. ③ “제삼의 흠점(欠點)은 교역자의 무식함이외다.” 보통학교 졸업 정도의 학력도 없는 사람들이 신학교에 와서 매년 3개월씩 5년간 즉, 15개월만 공부하면 목사가 되어 만인의 정신적 지도자가 됨을 비판하고 있다. ④ “제사의 흠점(欠點)은 미신적이요.” 미국 선교사들이 미개한 민족에게 전도하는 방법으로 신앙의 심오한 이론을 가르치지 않아서, 미신적인 방법으로 기도하고 병 낫고 자식을 얻으려고 한다는 비판이다.
그는 이러한 글을 쓴 자신을 책망하기 전에 기독교가 먼저 반성하라고 권한다. 그리고 이러한 글을 쓴 이유는 교회와 사회를 위한 애정 때문임을 하나님 앞에서 장담한다고 하면서 글을 마치고 있다. 이광수의 비판은 오늘 한국기독교가 깊이 새겨볼 필요가 있다. 100년 전의 비판적인 상태가 호전되지 못하고, 오히려 비판거리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기독교의 모습이 안타깝다.
문성모 목사
<전 서울장신대 총장•한국찬송가개발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