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순교자들 (4) 김철훈 목사 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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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훈 목사의 산정현교회 복구 결심

헌신과 순교•고난의 길을 택한 목회자

김철훈 목사는 그날 밤 기도하는 가운데, ‘산정현교회는 순교자 주기철 목사가 목회했던 교회가 아닌가? 이 교회가 피투성이의 싸움을 벌여 과거의 영광이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평양의 수치요, 나아가 한국교회의 가슴 아픈 일이다’라고 생각하며 드디어 이 제단을 복구할 결심을 했다.

이 소문이 퍼지자 동평양교회는 하루아침에 벌집을 쑤셔놓은 듯 시끄러워졌다. 목회 잘하는 김철훈 목사를 데려간다며 야단들이었다. 그러나 김철훈 목사는 “내가 편한 교회로 간다면 미안하겠지만 좋은 교회 두고 시끄럽고 어려운 교회로 가지 않습니까? 동평양교회 목사라기보다 한국교회 목사라고 생각하세요. 산정현교회가 무너지면 한국교회가 무너집니다”라고 했다. 한번 결심한 그는 돌이키지 않았다. 이때가 1948년 2월이었다.

그는 주기철 목사의 목회지인 산정현교회에서 목회하다가 순교하리라는 각오로 그는 1948년 2월 그믐에 산정현교회로 부임했다. 

목회하면서 그는 하루도 집에 가서 자지 않았으며, 자녀에게 관심을 접는 등 완전히 집안 살림에 관심을 끊고 교회 2층 기도실에서 매일 매순간 기도하며 전도하며 교회를 일으켜 세웠다.

김철훈 목사는 외국 유학을 떠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평양의 산정현교회가 무너지면 평양의 모든 교회가 무너진다며 고난의 길을 택한 것이었다. 그는 순교의 길을 예비하며 살았다. 이것이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충성된 목회자의 선택이었다.

이삿짐을 옮긴 김철훈 목사는 역사 깊은 예배당 구석구석을 돌아보았다. 교회가 아름답고 웅장하기도 하거니와 우아했다. 다음날 새벽 제단에 선 김철훈 목사 앞에는 몇 사람의 성도들만 나와 있었다. 찬바람이 돌았다. 김철훈 목사는 우선 동평양교회에서 기도 열심히 하고 신앙 좋은 10여 명의 성도에게 편지를 보냈다. “능력 있는 성도들의 기도 지원이 아쉽습니다. 부디 산정현교회에 성령의 불이 내리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편지를 부치고 난 후 김철훈 목사는 각오를 단단히 했고, 교회가 본궤도에 오르기 전에는 절대로 집에 가서 자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성가대석 옆에 있는 작은 방을 치우고 거기에다 임시 기도 제단을 쌓았다. 저녁이면 이곳에서 밤새도록 기도하고 성경 읽고 말씀을 준비했다.

며칠이 지나자 새벽기도회에 많은 교인이 모였다. 기도 소리가 높아졌다. 회개의 눈물로 새벽의 어두움을 밝혔다. 새벽기도가 뜨거워지자 온 교회가 뜨거워졌다. 

낮에는 심방, 밤에는 철야기도회가 이어지니 교회가 하루가 다르게 과거 영광의 자리로 돌아왔다.

김철훈 목사는 이 무렵 평양신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그러나 한 가지 근심과 걱정은 공산당의 행패였다. 하루가 다르게 교회를 괴롭히고 교역자를 납치해갔다. 살벌한 사회 분위기였다. 유계준 장로는 혹시나 해서 백인숙 전도사에게 항상 김철훈 목사를 수행하도록 당부했다.

1948년 6월 25일, 유계준 장로의 염려가 현실로 다가왔다. 이날은 금요일이었다. 연화동교회에 평소 친했던 전도사의 장례식 날이었다. 김철훈 목사는 시간을 앞당겨 이순경 목사를 모 교회의 집사와 만나게 해주고 혼자 연화동교회로 걸어갔다. 그 후로 행방불명이 되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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