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들의 헌신과 전주 기전여학교의 성장 이야기
인도아 선교사는 현재 미국 애틀랜타에서 소수민족선교회 총무를 맡으면서 일본인 교회, 한국인 교회, 멕시코 교회 등을 순회하면서 돌보고 있다. 가끔 한인 교회를 방문해서 설교를 하면 옛날 한국 농촌과 섬 지방에서 일어났던 귀신 이야기, 도깨비 이야기가 단골 메뉴로 등장한다. 그는 이제 과거 한국의 어두웠던 시절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즐거운 여생을 보내고 있으며, 그의 학구열은 계속되어 은퇴 후에 미국 풀러신학교에서 선교학 박사를 받아 미국 교계에서도 인정해 주는 선교사로 위치하고 있다.
누구든지 애틀랜타에 가서 전라도에서 왔다고 하면 곧장 차를 몰고 영접하러 나오고, 거기에다 전라도 사투리는 그로 하여금 동질성을 갖게 해주고 있다. 1997년 3월 5일 목포 양동제일교회 100주년 행사시에 배유지 선교사 후손으로 초청을 받아 목포를 다녀갔는데, 이때 주일 낮에는 나주교회(정남교 목사 시무)에서 밤에는 광주 동광교회 (남정규 목사 시무)에서 각각 설교를 했다. 그런데 나주교회에 가서 정남교 목사를 남정규 목사라 해 한바탕 웃었다는 후문도 있었고, 역시 광주 동광교회에 가서는 정남교 목사라 소개하면서 또 한바탕 웃었다고 하니 얼마나 위트가 넘치는 분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전주 기전여학교와 선교사들
사랑방에 모여든 소녀들
최마태 선교사는 최의덕 선교사의 여동생으로 이들 남매는 미국 남장로교 7인 선발대의 한 사람으로서 최초로 호남선교에 힘을 쏟은 선교사이다. 그런데 최마태 선교사는 미모가 너무 빼어나 많은 전주 여성들이 그의 미모를 구경하기 위해서 줄을 설 정도였다니 그가 얼마나 미인이었는지 잘 입증해 주고 있다.
최마태 선교사가 1900년 4월 자신의 방에서 3~4명의 여학생들을 불러 모아 교육을 시킨 것이 오늘의 전주 기전여자중·고등학교가 되었다. 그러나 군산에서 활동하던 전위렴 선교사가 건강상의 이유로 전주로 이거하면서 기전여학교 교장의 직책을 맡던 중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희생적인 삶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서 전킨 메모리얼 여학교라고 부르게 되었다.ㅁ
한편 학교가 점점 발전해 가자 많은 여학생들이 기전 동산에 모여들기 시작했으며, 이 일로 시설 확장이 급선무가 되었다. 그래서 새로 부임한 교장 랭킹 선교사는 학제 변경에 따라 보통과와 고등과를 따로 설치하고 운영했다. 그런데 랭킹 선교사는 맹장 수술 후 합병증으로 1911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 일로 기전여학교는 학교 일로 두 사람이나 순교자가 생겼다. 랭킹은 1879년 미국에서 출생해 1907년 처녀의 몸으로 전주에 온 선교사였다.
랭킹 선교사의 죽음
그의 선교 사역지는 기전여학교였으나 그만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되자 그를 보낸 미국의 부모들은 여간 안타까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학제가 정돈되었고, 그 학제를 바탕으로 전주뿐만 아니라 전북 지방에 있는 모든 소녀들에게 배울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그가 비록 짧게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희생적인 정신을 이어받은 많은 선교사들은 그의 몫까지 열심히 일했으며, 지금도 그의 무덤은 전주 외국인 선교사 묘지에 위치해 있다.
그후 잠시 버클랜드(Miss S. M. Buckland, 한국명: 박세리) 선교사가 제3대 교장직을 맡았지만 1913년 교장직을 사임하고 농촌 부녀자들의 계몽운동과 선교운동에 전력을 다했다. 그러나 1936년 무리한 활동으로 몸이 쇠약해져 더 이상의 활동을 중지하고 고향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끝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그 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제4대 교장으로 취임한 콜튼(Miss S. A. Colton. 한국명: 공정순, 이하 공정순으로 표기) 선교사는 1878년 정월 모로간턴에서 출생했다. 그녀는 장로교여자대학을 졸업하고 1911년 한국 선교사로 전주에서 기전여학교 학생을 가르치면서 사역했다. 1913년 기전여학교 교장으로 활동했던 공정순 선교사는 1937년 폐교 직전까지 헌신적으로 학교를 사랑하면서 선교사역에 임했다. 그래서 지금도 그의 사랑을 받고 자란 기전 출신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젊은 시절을 모두 기전을 위해 바친 공정순 교장의 한국에서의 생활은 기전을 발전시키는 일과 선교하는 일이 그의 전부였다. 학생들을 무척 사랑했으며, 때로는 학생들을 초청해 대접도 잘 했으며, 농촌을 돌아다니다가 가난한 아이라도 만나면 꼭 데려다가 기숙사에 기거하게 하고 기전여학교에서 공부를 시키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정열을 쏟았던 공정순 교장은 안식년을 맞아 1937년 일시 귀국했으며, 이때 임시로 인돈 신흥학교 교장이 교장의 직무를 맡기도 했다.
그러나 공정순 교장이 안식년을 마치고 귀국했더니 이때 이미 학교는 폐교된 후였다. 그는 기전 운동장을 맴돌면서 지친 나머지 운동장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며 기전을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니 얼마나 훌륭한 교장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그 후 그는 귀국해서 미국 남장로교 세계선교부에서 1943년 12월 은퇴할 때까지 봉사했고 내슈빌에 있는 안식관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72년 12월 20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늘나라로 떠났다.
참으로 공정순 교장은 한국에서의 가장 어려웠던 시절에 교장을 맡았다. 1919년 3·1운동시 전주 기전여학교에서도 도도하게 흘러 내려오는 3·1운동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그녀는 혹시라도 이 운동을 전개하다가 학생이 구속되면 어떻게 할까 걱정하며 열심히 기도했다.
우리 부형을 학살한 강도들아
전주 지방의 3·1운동은 이미 앞에서 언급했지만, 기전여학교 출신인 임영신이 천안에 있는 대양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 함태영 밀사를 만나 전주에서의 거사를 준비하게 되었다. 그는 즉시 전주에 내려와 평소에 존경해 오던 이동수 장로를 상면하고, 기전여학교 교사 및 학생들은 조직적으로 준비를 했다. 그때 전주 신흥학교 교사 및 학생들, 그리고 서문교회 교인들과 전주 시민들이 합세해 3월 13일 전주 장날을 기해 만세를 불렀다. 이 사건에 대해서 사학자 박은식은 자신의 저서 「한국독립 운동의 혈사」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