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전라도가 고향이지요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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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의덕 선교사·최중진 3형제, 만남과 기독교 전파

최의덕 선교사와 농민운동가 최중진

최의덕 선교사는 동학 농민운동의 실패로 좌절해 있는 정읍 지방과 고부 지방을 열심히 드나들면서 복음을 전파했다. 그런데 고부 지방에서 뜻하지 않게 최중진 3형제를 만나게 되었다. 

“저는 미국에서 온 선교사 최의덕입니다.” “저는 고부에 사는 최중진이며, 여기는 제 동생 최광진, 최대진 이렇게 3형제입니다.”

최의덕 선교사의 원래 이름은 테이트이다. 그런데 한국인들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려면 혀가 잘 안 돌아가서 한국인들에게 더 친근감을 주기 위해서 테이트를 최의덕이라고 부르게 했다. 그래서 최의덕은 전주에서 이름을 얻었다고 해 항상 전주 최 씨라고 말하고 다녔으며, 그의 동생 메티 테이트도 최마태라고 불렀다. 최중진은 최의덕 선교사와 인사를 나누고 자신의 성장 과정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우리 3형제는 부모님과 함께 고부의 넓은 들녘에서 열심히 일해 왔습니다. 그러나 추수 때가 되면 조병갑 군수가 과다한 세금을 매겨 열심히 수확을 해도 다 세금으로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듣고 있던 최의덕 선교사는 정의감이 넘치는 청년임을 깨닫고 그의 말에 더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저는 정의감 때문에 전봉준이 이끈 농민·동학군에 합세해 전주까지 진격했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들이 머물고 있다는 은송리 마을을 지나서 얼마 동안 전주를 지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삼례를 지나 공주까지 진격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일본군인이 동학 농민군을 공격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 3형제는 함께 순창에 사는 누님집으로 피신을 했습니다. 그런데 일본군인이 우리가 피신해 있던 누님집을 급습했고, 할 수 없이 담을 넘어가려고 했는데 그 순간 일본군인이 던진 칼이 목뒤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이때 최중진은 최의덕 선교사에게 자신의 흉터가 있는 목을 보여 주며 기적같이 생명을 구하게 되었다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젊은 청년, 당신의 생명은 하나님이 보호해 주셨습니다. 당신들 3형제는 제가 전하는 기독교를 믿고 저를 도와 주세요. 여러분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이 말에 최중진 3형제는 최의덕 선교사의 열렬한 전도의 힘에 눌려 그만 예수를 믿기로 결정했다.

최중진은 최의덕 선교사의 사랑을 받으면서 그때부터 기독교 진리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터득해 갔으며, 그의 두 동생인 최광진, 최대진도 최의덕 선교사의 안내로 기독교 진리에 정진했다. 최중진과 최광진은 즉시 최의덕 선교사가 살고 있는 전주로 이사를 했고, 최광진은 목수 일에 정진하면서 최의덕 선교사 구역 내의 모든 교회를 담당했다. 최중진은 한문 실력이 뛰어나서 전주에 사는 유생들과 자유롭게 토론하며 기독교의 진리를 설파하며 열심히 전도에 임했다.

최의덕 선교사도 최중진과 그의 동생들을 얻은 것이 천군천사를 얻은 것처럼 의기양양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최중진은 키도 크고 체구도 좋아서 모든 사람들이 최중진을 부를 때 최중진 장사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매년 추석날이 돌아오면 고부를 중심으로 해서 장사씨름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우승은 항상 최중진의 몫이었다. 그는 고부장에서만 우승을 한 것이 아니라 인근에 있는 정읍, 김제, 삼례까지 원정을 다니면서 씨름대회의 우승을 휩쓸 정도였으며, 그의 명성은 이미 전라도에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최의덕 선교사는 뜻하지 않게 대어를 낚은 셈이었다. 그래서 그는 시간만 있으면 최중진을 앞세우고 장을 돌면서 노방전도를 실시했다.

“야! 저기 최 장사가 나타나서 전도 강연을 한다.”

장꾼들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들이었다. 장꾼들은 귀가 쫑긋해 가지고 최 장사가 나타나서 전도 강연을 한다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여러분, 저는 고부에서 전봉준 장군을 따라다녔던 최중진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대로 저는 최 장사입니다.” 

지나가는 장꾼들의 이야기는 고부읍을 비롯해서 김제, 금구, 삼례, 전주성까지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이때 최의덕 선교사는 전라도 지방에서 조사로 활동하고 있는 김필수, 윤식명, 김창국, 최중진 이렇게 4명을 장로회신학교 입학 시험에 추천했다. 당시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의 입학시험은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서 실시한 것이 아니라 선교부가 상설되어 있는 지역에서 치러졌다. 그 곳에 선교사들이 모여 시험관이 되어 이들의 합격 여부를 결정했다.

최초로 전라대리회의 추천을 받고 시험에 응시한 4명 중 3명이 합격했다. 그 중 김창국은 나이가 어리다 해서 입학할 수가 없었으나 그 대신 그는 최의덕 선교사의 특별한 배려로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교에 입학해 첫 유학생이 되었으며, 역시 첫 숭실인이 되었다.

시험에 합격한 최중진, 김필수, 윤식명은 1906년 4월에 개학을 맞이해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장로회 신학교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를 비롯해서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 호주장로교 선교부, 캐나다장로교 선교부 등이 참여해 운영했다.

교수로는 4개 선교부에서 파송한 선교사들이 참여해 수업이 실시되었는데, 최의덕 선교사와 목포선교부에서 활동하던 배유지 선교사가 파송을 받고 평양까지 가서 한 학기를 강의했다. 더욱이 두 선교사는 자신의 구역에서 목사 후보생이 배출되고 평양에서 수업을 받고 있어 참으로 뿌듯하게 생각했다.

역시 최중진이나 김필수나 윤식명도 자신을 추천하고 자신들과 함께 일했던 선교사 밑에서 신학을 연구하는 일을 큰 보람으로 느꼈으며, 이때 신학생들은 경상대리회에서 추천받아 온 학생을 비롯해서 경·충대리회의 신학생, 황해대리회의 신학생, 함경대리회의 신학생, 평남대리회의 신학생, 평북대리회의 신학생. 이렇게 7개 지방대리회의 추천으로 평양에 왔기 때문에 여러 동역자를 사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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