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을 통한 삶과 믿음 이야기] 고요히 깊어가는 이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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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릴 때부터 아버지께서는 종종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너의 형이 잘 되면 너는 덩달아 잘 될 것이니 부지런히 살림을 잘 배워라.” “아버지! 저도 초등학교 때 반에서 몇 번 1등도 하지 않았어요?” “나도 잘 안다. 그렇지만 아버지 말이 옳다. 그렇게 해야 한다.” 

그때 어머니께서 나를 조용한 곳으로 불러 하신 말씀이다. “너는 형에게 의지하지 말라. 비록 지금은 너의 형이 너를 끝까지 도와주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 후 장성해 너의 형과 네가 모두 장가를 들게 된다. 그때는 너의 형이 형수의 의견을 존중하다 보면 돕지 못할 때가 많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동서 간에도 도움을 받는 사람은 도움을 주는 사람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 그때의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그러니 너는 너대로 장래를 준비해야 한다. 절대 형에게 의지하지 말라. 이 길이 먼 장래까지 형제간에 우애하는 길이다”고 하시며 그 실 예까지 말씀해 주셨다. 

“어머니, 알겠습니다. 꼭 명심하겠습니다.” 그날 어머니와 나는 굳게 약속했다. 그 뒤 몇 개월 후의 일이다. 내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어느 날, 농사를 짓기 위해 집에서 약 2km 떨어진 밭에 퇴비를 리어카에 싣고 나르던 중이었다. 혼자 힘겹게 나르는 나의 모습을 보신 어머니는 리어카 뒤를 밀어주시겠다고 하셨다. 괜찮다고 말씀을 드렸으나 한사코 뒤따라오셨다. 밭에 가려면 한 번쯤 쉬어야만 했기에 리어카를 길 한쪽에 받쳐두고 쉬는 참이었다.  

그때 우리 앞을 지나가는 멋쟁이 부인이 파라솔을 받쳐 들고 가다가 어머니를 보고 깜짝 놀랐다. 당시는 파라솔이 아주 귀할 때라 아무나 가지고 다닐 수가 없는 때였다. 그런 멋쟁이가 어머니 곁에 다가와 “아니 김귀례 씨 아니요?” 하며 노동복 차림의 험상궂은 어머니의 손을 덥석 잡는다. 그리고는 한 십여 분 가량 정담을 나눈 뒤 헤어졌다. 

나는 어떻게 아는 분이냐고 물어봤다. 1927년 수원양잠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3년간이나 한 기숙사에서 지냈고, 졸업 후 1년간이나 정읍군청 잠업과에서 함께 근무한 다정한 사이라고 하셨다. “그때가 일제강점시기가 아니에요?” “그렇다.” 그 당시에 잠업을 장려하기 위해 일제 때 설립한 학교란다. 그러기에 그 학교를 졸업하면 행정기관으로 발령을 냈단다. 마치 현재 사범학교를 졸업하면 각 학교에 발령을 내듯이 말이다.

나는 다시 어머니께 물었다. “창피하지 않아요?” 말씀을 잠시 멈추신 어머니는 “네가 창피란 말의 의미를 아직 잘 모르는구나. 자기가 할 일을 다 하지 않고 남에게 구걸했을 때 그것을 가리켜 창피라고 한단다. 가령 ‘내 자식이 굶고 있으니 쌀 한 되박만 주십시오’ 한다든가 ‘내 아들 학비가 없으니 돈 좀 꾸어주십시오’ 이같이 아쉽게 부끄러운 말을 할 때 그것을 가리켜 창피라고 한단다. 우리와 같이 자기 일을 능력껏 해서 생활하는 그 자체는 떳떳한 일이지 어떠한 부끄러움도 아니다. 너도 앞으로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나는 어머니 말씀이 옳다고 느껴져 지금 고학하기 위해 신문배달 하는 일도 떳떳하게 생각했다.  

전날까지만 해도 신문을 배달할 때 초등학교 동창생들을 만나면 창피하기도 하고 주눅들은 사람처럼 기를 펴지 못했다. 이런 자격지심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던가를 스스로 뉘우치면서 자신감에 불타고 있었다.

하재준 장로

 중동교회 은퇴 

 수필가·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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