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라고 하면 대부분 오스트리아 태생으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철학 교수였던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을 떠올릴 것이다. 분석철학 혹은 언어철학이라고 부르는 그의 철학은 난해하기로 유명한데, 그의 삶도 이에 못지않게 비범했다. 그는 1889년 오스트리아 최고 갑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전 재산을 남김없이 기증하고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가난한 유학생으로 시작해 평생을 수도사와 같은 청빈한 삶으로 일관했다. 말년에는 노르웨이 해안가 초라한 오두막에서 살다가 1951년에 생을 마쳤는데, “멋진 삶(wonderful life)이었다고 친구들에게 전해주시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의 철학은 말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고, 말로 할 수 있는 것은 명확히 말해야 하지만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유명한 구절로 요약할 수 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말 같지만, 언어의 한계를 명확히 정하고 그 한계 안에 있는 것과 밖에 있는 것을 구분하는 것이 철학의 최종 목표라는 그의 지론을 잘 보여 준다.
가령 어떤 사람이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큰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는 사건은 명확하게 말할 수 있고 증명 가능한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 교통사고에서도 멀쩡하게 살아난 것은 하나님이 보호하셨다는 증거다”라는 진술은 사실과는 무관하고 입증할 수도 없으므로 무의미한 진술이라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이다. 전자가 사실에 관한 진술이라면, 후자는 그 의미에 속한 것이므로 논리와 언어의 영역 밖에 있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과학은 사실에 관한 탐구이므로 언어와 논리의 영역 안에 있는 반면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하나님의 존재와 같은 것들을 다루는 윤리학, 미학, 종교는 말할 수 없는 것에 속한다. 즉, 세상의 모든 사실을 과학이 설명해 낸다고 하더라도, 삶의 의미에 대한 물음에는 전혀 답할 수가 없다. 그래서 삶의 의미는 이성과 논리로 접근할 수가 없고, 구체적인 삶에서 선택과 결단을 통해서만 구현되고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젊은 시절에 비트겐슈타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같은 질문들은 문자 그대로 난센스이고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까닭에 자연과학적인 질문만이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인생의 후반에 접어들면서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질문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랑과 우정, 종교적, 예술적 체험은 논리로 설명할 수 없지만 이런 경험이 삶을 가치 있게 만든다는 깨달음에 도달했다.
그는 세상을 보는 관점에는 과학의 눈과 기적의 눈,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들에 핀 야생화를 과학의 눈으로 보면 세포의 대사작용으로 설명 가능한 평범한 꽃이다. 그러나 기적의 눈으로 보면 한 송이 야생화는 하나님의 오묘한 손길로 빚어낸 기적과 같은 존재다. 과학은 세상을 무미건조하고 생동감 없는 눈으로 바라보고, 대상으로부터 경이와 기적을 처음부터 배제한다. 그 때문에 과학 문명은 모든 위대한 것과 고귀한 것을 보는 눈을 멀게 했다고 비트겐슈타인은 말한다. 그는 말년에는 논리와 이성이라는 차갑고 건조한 세상 너머에 있는 경이와 기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았다.
그렇다면 과학이라는 냉철한 이성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도 동시에 우리 삶이 기적과 경이로 가득 차 있음을 경험하는 균형 있는 관점이 바로 현대를 사는 신앙인에게는 꼭 필요할 것이다.
김완진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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