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전라도가 고향이지요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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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덕삼과 이자익의 신분 넘어선 신앙과 교회 변화

감히 원평 고을에서는 조덕삼에게 항의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조덕삼의 조상은 원래 평양에서 살았으며, 김제 금산에 금이 많이 난다는 소식을 듣고 5대 할아버지가 두정리에 정착하면서 금 발굴에 힘을 쏟고 있었다. 조덕삼도 조상들의 덕분에 많은 재산을 소유하게 되었으며, 전북 지방의 비단과 농토는 거의 소유하고 있던 큰 부자였다.

그런데 그 당시 이자익이란 젊은 소년이 경상남도 남해란 섬에서 단신으로 김제까지 오게 되었다. 이자익은 남해 섬에서 하도 가난하게 자라서 밥을 굶는 날이 먹는 날보다 많다 보니 끼니 한 번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자란 소년이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서 어머니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이자익을 불러 놓고 그에게 살 길을 찾아갈 것을 당부했다.

“자익아, 나와 함께 있다가는 너도 죽고 나도 죽겠다. 너는 앞길이 창창하니 여기서 그냥 굶어 죽으면 안된다. 그러니 너라도 전라도 넓은 땅에 가서 남의 농사일이라도 돌보면 배는 곯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이다.”

이자익의 어머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전라도 땅으로 보낸다니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말문을 열면서부터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이러한 광경을 지켜본 어린 이자익도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때 이자익은 넓은 전라도 땅에서 농사일을 하기만 하면 배를 채울 수 있고, 또 농토도 장만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갖고 남해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는 남해에서 배를 타고 육지로 향했다. 그리고 하동읍을 거쳐서 남원, 전주까지 오게 되었다.

“아저씨, 저는 경상도 남해에서 온 사람인데요. 전라도에 가면 남의 집에서 일하면서 살 수 있다는데 어디로 가면 좋을까요?” “응. 그래, 여기 전주에서 저기 보이는 모악산을 바라보면서 계속 내려가면 금구라는 곳이 나오는데 거기 가면 어느 집에서라도 먹고 자고 일할 수 있지.”

이 말에 자신을 얻은 이자익은 열심히 걸어서 금산사 밑에 있는 금산까지 오게 되었다. 이미 앞에서도 말했지만 조덕삼이란 사람은 김제 금산에서 사금을 캐기 위해서 열심히 활동했던 사람으로, 김제 지방 뿐만 아니라 정읍, 부안, 삼례, 함라, 용인, 강경까지 다니면서 비단장사를 했으며, 여기에 농토까지 많아 그 당시 그 지역에서는 내로라하는 사람이었다.

이 집에는 머슴도 많이 있었지만 이자익은 조덕삼의 말을 끌고 다닌 마부였기에 조덕삼과는 아주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다.

최의덕 선교사는 전주선교부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금산 두정리교회를 자주 방문하면서 신앙 지도를 아끼지 않았다.

당시 선교 구역을 맡았던 최의덕 선교사는 조사 최중진을 대동하고 학습·세례문답 일정을 세워 각 교회에 전했고, 1902년 봄 금산에 있는 두정리교회에서도 학습·세례문답이 실시되었다. 1차적으로 조덕삼, 이자익, 왕칠순, 이렇게 세 사람이 학습문답에 응했으며, 이들은 최의덕 선교사 앞에서 자신 있는 대답을 했다. 그리고 같은 해 가을에 세례문답에 세 사람은 합격했다. 원래 이자익은 한글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없어서 배우지 못했지만 조덕삼의 자녀 조영호가 독선생을 불러서 특별수업을 받을 때 공부방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창문 밖에서 들으며 배운 것을 시작으로 그 곳에서 천자문과 한글을 터득했다.

당시 학습․세례문답은 한글을 모르면 문답에 응할 수 없었으며, 응하더라도 불합격이 되었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야학운동을 전개해 문맹자를 따로 모아 한글을 가르침으로써 학습․세례문답에 응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다시 한 해가 바뀌어서 최의덕 선교사는 조덕삼, 이자익, 왕칠순에게 집사직을 임명했고, 1904년에는 두정리교회 교인들과 힘을 모아 기역자(ㄱ)교회를 신축했다. 최의덕 선교사는 자신의 구역에 교회가 아름답게 건축되는 일에 감격했다.

교인들은 모악산에 올라가 그 아름드리 나무를 나르면서 교회의 기둥을 하나둘씩 세우며 전교인이 힘을 모아 교회당을 완성했다. 그리고 이 교회에서는 일꾼인 장로를 선출하기 위해 세례교인 이상 여러 교인들이 좋은 일꾼, 믿음이 독실한 일꾼을 뽑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공동의회를 소집한 후 장로 1명을 선출했다. 모든 교인들은 조덕삼 집사가 당선되리라 생각했지만 조덕삼 집사는 떨어지고 생각지도 못했던 이자익 집사가 장로로 피택되었다. 당시 한국교회에서는 교회 내에서도 천민 양민 구별이 극심한 때였지만 두정리교회에서는 그러한 사고방식을 완전히 깬 것이다.

“선교사님, 저는 장로 직분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 사퇴하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선교사나 일반 교우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당회장님, 이자익 집사의 피택 장로 사퇴는 있을 수 없습니다.”

조덕삼 집사는 자신은 비록 장로로 피택되지 않았지만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이자익 집사가 피택된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했다. 이 투표가 끝나자 금산 지방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아니, 조덕삼 집사가 장로 투표에서 낙선이 돼? 허참 별놈의 세상이 다 있구먼. 아니야, 예수교 안에서는 신분이나 계급 같은 것을 타파하는 곳인가 본데 뭐, 잘됐구먼.”

그리고 얼마 동안 그런 말들이 오고 갔지만 이자익은 최의덕 선교사 밑에서 장로의 훈련을 잘 받고 장로로 장립을 받았다. 이자익은 이미 전북대리회에서 최초로 장로가 되었던 김필수, 최중진의 지도를 받으며 장로직을 수행했다.

노총각 선교사의 결혼

최의덕 선교사는 잠시 선교 구역을 매큐첸(L. O. McCutchen. 한국명: 마로덕, 이하 마로덕으로 표기) 선교사에게 임시로 맡기고 결혼하기 위해 상경했다.

최의덕 선교사는 30세가 되던 해 한국 선교를 위해서 독신으로 내한했는데 독신으로 내한했던 선교사들이 처녀 선교사들과 결혼한 일들이 많았다. 우선 하위럼 선교사는 군산에서 활동하던 중 데이비스 여선교사와 결혼했으며, 목포에서 사역을 했던 오원 선교사도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소속 위팅과 결혼을 했다. 그리고 군산선교부 부위렴 선교사도 결혼을 했는데, 최의덕 선교사는 일에 파묻혀서 결혼도 잊은 채 오직 자신의 선교 구역에만 몰두하다가 43세가 되던 1905년 같은 전주선교부에서 활동하던 잉골드 여의사와 결혼을 했다.

잉골드 선교사는 1895년에 내한해 10년간 환자를 돌보는 일에 전념했으며 그런가 하면 주말이 되면 쉬는 것도 잊은 채 다른 동료 선교사들의 협조를 얻어 농촌, 산촌 등지로 돌아다니며 무료진료를 다니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잉골드 선교사도 결혼의 적령기를 넘겼으므로 주위 선교사들의 권유로 노총각 선교사 최의덕과의 결혼을 위해 1905년 3월 따뜻한 봄에 상경해 언더우드 선교사의 집례로 결혼예식을 치렀다. 그리고 그대로 신혼여행을 가야 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극성에 일본 고베로 갔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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