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숙 여사•막내 이정화 교수와의 인터뷰
내가 작가 이광수의 부인 허정숙(許英肅) 여사를 인터뷰한 것은 1970년 전후였다. 효자동 집으로 찾아간 날, 마침 미국에서 귀국한 막내 따님 이정화(李廷華) 여사와도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내가 허 여사의 자택에 이르렀을 때 이정화 여사와 그의 남편 아이엥가(인도) 박사와 어린 자녀 세 식구를 만나게 되었다. 잠시 응접실에서 인사를 나누고 이 여사가 내게 “우리 사진찍으러 가요”라는 인사말을 남기고 세 식구가 외출하는 모습이 기억에 남아있다.
당시 내가 근무했던 현대경제일보(현 한국경제신문) 조사부에 이 인터뷰 기사를 확인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정확한 날짜를 기억하지 못해 찾기 어렵다는 전갈이다.
허 여사를 인터뷰한 기사가 나간 다음 기사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며 허 여사께서 편집국장에게 항의하는 전화를 한 것이다. 그 일로 나는 편집국장에게 불려가서 질책을 받았다. 내용인즉 막내 따님이 외국인과 결혼한 것도 마음에 걸리곤 했는데, 인터뷰 기사엔 큰 따님도 외국인과 결혼했다는 부분(필자의 착각이었음)에 화를 참지 못하고 전화로 항의해 온 것이다.
그후 50여 년 만에 이정화 여사를 서울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미국 버지니아주 포토맥 포럼(이영묵 대표) 서울 심포지엄(송현호 교수 주관)에 참석해 50여 년 만에 해후한 것이다. 이날 모임에서는 이광수 기념사업을 위한 논의도 있었다.
이정화 교수가 월간조선(‘24. 6.)과의 인터뷰에서 어렸을 적에 본 아버지의 모습, 아버지의 친일 문제, 6.25때 인민군에 끌려가던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자신이 일곱 여덟 살 무렵, 아버지가 정란 언니에게 토마스 하디의 <테스>를 원문으로 읽으며 번역하는 등 소설책으로 영어 공부도 함께 했다고 회상한다. 자신도 아버지에게서 배운 영어 실력으로 이화여고 재학시에 <뉴욕 헤럴드 트리뷴>지가 주최한 세계 학생토론대회에 한국대표로 선발되어 참석했던 일화도 소개했다.
전 춘원학회 회장 송현호 교수(아주대)의 증언에 따르면 춘원의 재판기록에 춘원의 수양동지회 사건 최종심에서 검사의 질문 한 대목을 상기시킨다. “네가 황민화를 이야기하고 창씨개명을 이야기 했는데~ 결국 네 민족을 살리기 위해서 네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민족운동이 아니었느냐?”라고 물은 것이다.
춘원은 일제에 협력 행각으로 반민족주의자로 낙인찍혔다. 그는 창씨 개명에 앞장서고 지원병제를 찬성 적극 독려하는 등 일본 황민화 정책에 적극성을 보였다. 이 같은 행적은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 청산이라는 관점에 논란의 대상이 된 것이다. 또 현 춘원학회 회장 방민호 교수(서울대)는 춘원이 일제에의 협력에 대한 문제를 ‘~일제의 가혹한 탄압 속에서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안치호가 잡혀가 죽고, 이광수도 죽느냐 사느냐의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있었던 상황’인 당시의 ‘구조적 폭력이라는 조건’ 하에서 이루어진 사태임을 참작해야한다는 견해이다.
(계속)
박이도 장로
<현대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