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든 ‘예수천당’ 소리 끊이지 않게 전도
‘영혼들 구하는 찬송’에 경찰도 어쩔 수 없어
이 무렵 최 목사와 가까이 지낸 노영선 목사의 간증이다. “어느 날 나는 최 목사와 동행해서 평양으로 도보여행을 했다. 무진에서 조반을 먹고 가는데 큰길이라 사람들이 많았다. 최 목사는 한 사람도 빼지 않고 전도하며 40리 길을 걸어갔다. 대동교에 오니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 무리를 향해 ‘예수천당!’을 외쳤다. ‘예수천당! 예수 믿읍시다.’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나 외치는데 공교롭게도 교역자도 만나게 되었다. 교역자들이 ‘나는 목사요’, ‘나는 전도사요’ 하면 최 목사는 그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벙어리!’ 하면서 교역자들을 꾸짖었다. ‘송장이 수의 입고 다니는 것 같구나! 어서 전도하시오!’라고 외치기도 했다.”
그는 1926년 귀국해서 평안남도 강동교회에 부임했고, 이듬해부터 산정현교회 전도목사가 되어 평양을 중심으로 수안, 곡산 지방에 전도를 계속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라!” 등을 외치며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전도했고, 서문밖교회 곁에 있는 인덕 서관 2층에 전도관을 차리고 평양 시내 전도를 추진했다.
그가 평양에서 그렇게 전도할 수 있었던 데에는 길선주 목사의 주선이 컸다. 생활이 어려워 곤란할 때 길선주 목사는 최 목사가 떠나면 한국의 예루살렘인 평양성이 망한다고 하면서 돌보아 주었다. 그리하여 평양에는 최 목사의 “예수천당!”이 끊이지 않았다. 평양의 새벽 4시에는 늘 최 목사의 “예수천당!” 소리가 새벽을 깨웠다.
하루는 채필근 목사가 지나가는데 최 목사가 큰 소리로 “예수천당!” 하고 소리를 질렀다. 놀란 채 목사가 “나 채 목사요” 하니 최 목사 하는 말이 “채 목사는 목사지만 벌지 목사요” 했다. 평안도 사투리로 ‘벙어리’를 ‘벌지’라 했다.
또 하루는 남궁혁 박사 부인이 서문통 거리를 지나갔다. 최 목사는 그 뒤에서 “예수천당”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 남궁 목사 부인이에요” 했다. 최 목사는 “목사 부인도 전도 안 하면 벙어리요. 신학 교수 부인은 왜 전도 안 해요?” 했다.
최 목사는 찬송을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한번은 거리로 다니면서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를 부르고 있었다. 일본 경찰이 시끄럽다고 소리치니 “자동차가 뿡뿡 울리는 소리는 시끄럽지 않고 내가 찬송을 부르는 소리는 시끄럽다는 말이오?” 했다. 그는 경찰서에 잡혀가서도 말했다. “당신들은 교통사고를 막기 위해 자동차 소리를 그냥 놔두지만 나는 지옥으로 가는 영혼들을 구하기 위해 찬송을 부르오.” 경찰은 어쩔 수 없이 최 목사를 풀어주었다고 한다.
방지일 전도사가 며느리만 믿는 집에 심방을 갔다가 그의 시아버지에게 들은 말이다. “최 목사께서 그렇게 크게 소리를 지르면 아이 밴 여인은 아이가 떨어질까 염려되니 한번 말씀드려 주시오.” 그래서 최 목사와 둘이 있을 때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최 목사가 하는 말이 “나 최 목사가 하는 일이 그 일이오. 그 일을 하지 않으면 나는 할 일이 없는데 족제비가 꼬리 없으면 소용없다고, 최봉석이 그 일을 하지 않으면 할 일이 없어지는데 어떻게 하겠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방 전도사는 “목사님 하시던 대로 하세요”라고 했다.
평안북도 어느 산골 마을에서 전도하던 때 일이었다. 마침 화전(火田)을 만들기 위해 산에다 불을 질렀는지 한 곳에서는 온통 연기가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화전민들의 집은 한 곳에 모여 있지 않았다. 두세 집 정도 모여 있어도, 또 5리나 가야 다른 집들이 있었다.
고구마를 심은 밭이 펼쳐져 있었다. 집 앞에는 아이들이 어린애를 업고 서서 낯선 사람의 얼굴을 신기한 듯이 보고 있었다. 어디서 물이 흘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