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종교개혁인가, 신앙개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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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역사상 가장 강대한 국가였던 로마제국은 동서 두 나라로 분열된 뒤 서로마는 게르만족에게, 동로마는 오스만투르크에게 멸망당했다. 게르만이나 오스만투르크가 로마보다 강해서만은 아니었다. 로마가 안에서부터 썩어갔기 때문이다.

황제와 귀족들은 생산과정에는 전혀 참여하지 않은 채 소비생활의 향락만을 즐겼고, 나라를 지켜야 할 장군들은 용병에게 전투력을 의존한 채 출세의 기회를 노리며 정치판을 기웃거렸다. 시민사회는 퇴폐적인 향락과 사치에 빠져 음탕하고 사치스런 놀이를 즐기는가 하면, 검투경기장에 몰려들어 피비린내 나는 살인 게임에 열광했다.

로마의 역사가 플리니우스는 “원형경기장에서의 환락이 도덕적 타락의 전환점이었다”는 기록을 남겼고, 미국의 문인 에머슨은 “어떤 나라든지 자살로 밖에는 망하지 않는다”는 독설을 쏟아냈다. 나라 멸망의 원인이 나라 밖이 아니라 나라 안에 있다는 날카로운 지적이다.

한 나라가 안에서부터 멸망하게 되는 이유에는 정치인들의 부패와 무능, 지식 엘리트의 분열과 갈등,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건전한 시민사회의 붕괴 등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종교의 영역에도 분명한 원인이 있다. 바로 종교의 타락, 신앙의 일탈(逸脫)이다.

10월은 유럽 역사의 방향을 바꾼 종교개혁의 달이다. 종교개혁은 르네상스와 함께 중세의 폐쇄사회로부터 인간의 정신과 삶을 해방시킨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철학자 헤겔은 <역사철학강의>에서 ‘종교개혁은 중세기 끝에 여명(黎明)을 비추며 솟아올라 모든 것을 밝힌 태양’이라고 극찬했다.

4세기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공인(公認)되고 테오도시우스 황제 때 로마의 국교가 된 가톨릭은 핍박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자 안일과 번영의 유혹에 빠져들어 십자가의 좁은 문을 망각하기에 이르렀다. 유럽인의 삶과 정신을 깡그리 지배·통제하는 막강한 종교권력을 틀어쥐게 된 기독교는 드넓고 편안한 영광의 길을 좇다가 결국 로마가톨릭과 동방정교회로 갈라졌고, 마침내 종교개혁을 초래하기에 이르렀다.

크리스천들은 신앙고백을 늘 입에 달고 살아간다. 그렇지만 고백만으로는 아직 부족하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모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태복음 7:21) 예수의 말씀이다. 실제의 삶과 동떨어진 입술의 고백만으로 구원 얻으려는 태도를 나치 시대의 순교자 본회퍼 목사는 값싼 은혜(Cheap Grace)라고 질타했다. “십자가의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것은 ‘와서 복받으라’는 것이 아니다. ‘와서 죽으라’는 것이다.” 이것이 본회퍼가 깨달은 십자가의 값비싼 은혜(Costly Grace)다.

사도 바울은 성전 제사의식에 열중하는 유대교를 개혁했고, 루터는 공로주의의 중세가톨릭을 개혁했으며, 본회퍼는 독일교회의 개혁을 부르짖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 그들은 먼저 자기 자신의 삶을 혁신한 신앙개혁자들이었다. 바울은 율법주의의 족쇄를 풀어헤쳤고, 루터는 교황황제주의(Papocasarismus)의 사슬을 끊어냈으며, 나치 제국교회의 불신앙을 질타한 본회퍼는 히틀러를 암살하려던 발키리 음모에 가담했다가 처형당했다. 

이즈음 종교계의 현실을 걱정하는 이들이 많다. 종교개혁, 교회개혁을 외치는 목소리가 높다. 그만큼 우리 종교계의 실태가 그늘지고 어둡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종교개혁보다, 교회개혁보다 더 시급한 일이 있다. 바로 크리스천 각자의 신앙개혁 곧 ‘고백과 일치하는 삶’으로의 혁신이다.

자기 삶을 개혁하지 않고 자기 신앙인격을 혁신하지 않은 채 교회혁신을 외치며 종교개혁을 부르짖는 것은 위선이다. 우리 삶의 쇄신, 우리 인격의 변화가 종교개혁보다, 교회혁신보다 먼저다. 종교개혁의 달 10월, 스스로 고요히 묻는다. 나의 고백과 삶은 하나가 되어 있는가? 종교개혁, 교회혁신을 외치는 우리는 기복(祈福)과 형통의 우상숭배를 버리고 정녕 올바른 신앙개혁의 길을, 올곧은 삶의 길을 걷고 있는가? 

이우근 변호사

<법무법인 클락스 고문변호사, 전 서울중앙지법원장, 이화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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