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전라도가 고향이지요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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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선교 개척… 헌신적인 선교사들의 활동

그후 잉골드 선교사는 전주선교부와 군산선교부에서 주최하는 여자사경회 강사로 여성 보건 위생에 대한 특강을 맡았으며, 이 사경회가 끝나면 즉시 개교회를 돌아다니면서 여성 보건 위생에 대한 강연을 실시했다. 이 일로 농촌 여성들의 보건 위생에 관한 강연이 널리 전파되어 농촌이나 도시나 할 것 없이 앞을 다퉈 그를 청빙해 무지했던 여성들로 하여금 생리 현상이나 임신 과정 등 그동안 배울 수 없었던 놀라운 의학 상식과 육아 방법을 교육받게 했다.

그런가 하면 매년 농한기를 이용해서 전주선교부에서는 1년에 한 차례씩 달성경학교를 운영했는데 이때도 여성반, 남성반을 구별해 따로 실시한 관계로 보건 위생은 여자에게만 해당된 것이 아니라 남성에게도 필요한 과목이었다.

잉골드 선교사는 많은 활동으로 참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래서 그녀가 임신하고도 자신의 몸을 돌보지 못해 첫 딸아이가 사망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그 후로 출산을 금하고 오직 하나님의 사역만 한다면서 선교 활동을 하다가 남편과 함께 귀국했다. 먼저 남편을 하늘나라로 보낸 잉골드 선교사는 95세로 생을 마감하고 하늘나라로 떠났다.

잊을 수 없는 전위렴 선교사와 

유대모 선교사

군산 선교와 군산교회의 개척자가 되었던 전위렴 선교사와 드루(Dr. A. D. Drew, 한국명:유대모, 이하 유대모로 표기) 선교사는 한 팀이 되어 선교를 성공리에 이끌어 갔다.

최초로 군산에 발을 내딛었던 유대모 선교사는 1894년 3월 3일 이눌서 선교사와 함께 호남 선교 답사를 위해 군산항에 도착했다. 그때 군산은 당시 보잘 것 없는 어촌에 지나지 않았으나 1899년 이후 항구로 발전했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부산, 인천, 원산, 목포, 군산이 차례로 개항되자 일본인들이 군산에 몰려들었다. 이미 군산 첫 선교 답사에 임했던 유대모 선교사는 해상을 이용하면 보다 효과적인 선교를 수행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에 군산을 선교지로 선택했다.

그후 유대모 선교사와 배유지 선교사는 부인들과 함께 호남 선교에 임하게 됐는데 그 동안 전주 선교 개척에 공이 컸던 전위렴 선교사는 새로 출발한 군산선교부의 개척자로서 유대모 선교사와 함께 일하게 됐다. 유대모 선교사는 의사로서 군산에 부임했기에 그 지역의 많은 어민들은 그가 부임해 옴을 기뻐했다. 그래서 유대모 선교사와 전위렴 선교사는 기쁜 마음으로 1895년 3월 인천에서 배를 타고 군산에 왔지만 너무나 풍랑이 심해 많은 고생을 했다.

그러나 군산 어민들의 그 따뜻한 사랑은 전주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우선 이들은 배가 닿는 선창가에 조그마한 집 한 채를 빌려서 숙소 겸 진료소로 사용했다.

두 선교사는 한국인 조사와 함께 10시 반까지 밖에 나가 전도 겸 치료를 위해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환자들과 함께 온 보호자들이 몰려들자 전위렴 선교사와 그를 돕는 조사들은 바쁘게 일손을 놀려야 했다.

“여러분들 여기 계시는 동안 제 말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때 전위렴 선교사는 비록 서툰 한국어였지만 또박또박 말을 잘 전달했다. 그리고 진료 시간이 되면 한 사람씩 차례차례로 진료를 했는데 지역민의 적극적인 협력에 놀란 전위렴 선교사는 지난날 전주에서 일어났던 일과 비교하며 감격했다. 때마침 전위렴 선교사의 전도 강연을 듣던 김봉래와 송영도는 예수를 믿겠다고 결심하고는 자신에게 문답을 허락해 달라는 요청까지 했다.

그 후 약 1개월 가량 군산에 머물면서 진료와 전도에 임했는데 이들이 군산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 동안의 일이 너무 감사해서 생선, 굴, 김, 계란 등을 가지고 와서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지역주민이 많았다.

그렇게 이미 군산에는 복음의 씨앗이 떨어져 있었다. 두 선교사는 군산에 선교부를 상설하기 위해 1896년 2월에 전위렴 가족이 이사를 왔으며, 2개월 후에는 의사인 유대모 가족이 이사를 왔다. 군산에 사는 어민들은 두 선교사 가족이 군산에 오자 무척 반가워했으며 전위렴 선교사는 그의 조사 장인택과 함께 그의 집에서 첫 예배를 드렸다. 예배를 드렸다는 소식이 서울에까지 전해지자 독신으로 선교 준비에 힘을 기울이던 데이비스 선교사가 군산에 와서 부녀자들과 어린이를 상대로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데이비스 선교사는 미국 버지니아 주 아빙돈에서 출생했으며,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어머니를 따라다니면서 신앙을 키워 왔다. 한편 그의 어머니는 마음씨 좋기로 소문이 나 있었으며, 비록 가난하게 살았지만 병든 자의 가정을 방문해 그들을 위로하며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성서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집에서 어머니를 돌보고 있었는데 그가 다니던 아빙돈 교회에서 멕시코 선교사로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권유를 받았다.

“네, 목사님 감사합니다. 기도해 보고 결정을 하겠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열심히 기도를 해도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했다. 데이비스는 원래 아프리카 지방에 선교사로 가려고 생각했던 터라 멕시코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아빙돈 교회 목사가 다시 데이비스를 불렀다.

“지금 한국 선교사를 모집하고 있는데 그곳에 가면 어떻겠는가.”

“목사님, 한국은 처음 들어보는 곳이지만, 우리 남장로교에서 첫 선교사를 모집한다니 그곳에 갔으면 합니다.”

이렇게 해서 데이비스 선교사는 한국에 선교사로 나가기로 준비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어머니가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어머님, 제가 한국 선교사로 나간다는 것은 무리인 것 같습니다. 어머님께서 이렇게 깊은 병환 중에 계시는데 제가 떠나는 것은 무리일 것 같습니다. 어머님의 병이 나으면 그때 갈까 합니다.”

“아니다, 데이비스야. 지금 한국에서는 수많은 영혼이 너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으니, 내 병은 하나님께 맡기고 빨리 떠날 준비를 해라.”

데이비스는 어머니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고 한국에 있는 수많은 영혼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감동을 받고, 어머니의 병을 하나님께 맡기고 남장로교 7인의 선발대에 끼여 미국을 출발했다. 그리고 제1착으로 1892년 10월 18일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해 서울에 임시 숙소를 정한 후 다른 일행들을 기다렸다.

데이비스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의 따뜻한 사랑을 받으면서 한국의 언어를 배우고 이들의 도움으로 한국의 문화와 역사도 함께 배우면서 즐거운 나날을 보내었다.

어느덧 한 해가 바뀌었고 어느 정도 언어에도 자신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와 함께 짝을 지어 집 근처인 서대문 거리를 다니면서 전도를 했다. 이들의 행동에 흥미를 가진 부녀자들을 서대문 숙소까지 안내해 자신들이 살고 있는 방을 공개하면서 미국 과자를 선물로 주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 재미있게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군산선교부에서 연락이 왔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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