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산책] 노부부의 『불간섭 평화협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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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어느 ‘실버타운’에 와서 살고 있는 노부부가 잠시 그곳에 머물고 있던 한 변호사에게 ‘삼겹살과 소주’를 대접하겠다고 했다. 노부부는 자주 부부싸움을 하는데 변호사로서 누가 옳은지 판단을 해서 앞으로 여생을 편안히 살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 달라는 뜻이었다. 

남편은 금년 나이가 팔순(八旬)이고 부인은 몇 살 아래라고 했다. 노부부와 변호사는 불판 위에서 노릇노릇 구워지는 삼겹살을 앞에 놓고 사적(私的)인 「조정재판(調停裁判)」을 시작하게 되었다. 변호사는 먼저 남편 노인에게 말할 기회를 주었다. 

“애들 교육시키고 결혼시켜 내보낼 때까지 같이 50년을 살았어도 직장일로 바쁘다보니 아내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어요. 그런데 늙어서 여기 실버타운에 와서 둘이서만 살다보니 전에 안보이던 게 보이는 거예요. 문을 열고 들어오면 현관이 좁아서 신발을 놓을 자리가 없으니 신발을 신발장에 정리하면 될 텐데 그냥 포개놓는 거예요. 냉장고를 열어보면 음식물을 겹겹이 쌓아놨는데 밑에서는 벌써 음식이 상하고 있어요. 이제 나이를 먹었으니 돋보기안경이나 자기가 쓰는 물건은 손이 닿는 곳에 잘 정돈해 놨다가 바로 쓸 수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번번이 찾느라고 소란이에요. 그리고 자주 벌컥벌컥 성질을 내고 말이죠.”

그 말을 듣고 있던 부인의 눈빛에 분노가 서린 것 같았다. 변호사가 이를 눈치채고 일단 열을 식힐 필요가 있다고 판단이 되어 이렇게 말했다. “삼겹살이 다 구워졌으니까 한 점씩 드시고 사이다 한 잔으로 속을 시원하게 푸신 후에 말씀을 계속 듣도록 하죠. 잡수신 다음에는 부인이 진술하실 차례입니다.”

남편인 영감님은 소주 한잔을, 부인과 나는 사이다 한잔을 들이켰다. 잠시 후 부인이 말을 시작했다. “남편이 직장에 다닐 때는 떨어져 산 적이 많아요. 평소에 남편은 나를 조금 도와주고는 너무 ‘공치사(功致辭: 자신의 수고를 생색내며 스스로 자랑함)’가 많아요. 생색을 안 냈으면 차라리 고마운 마음이 들 텐데 말이죠. 영감이 냉장고만 열면 학생이 숙제검사 받는 것처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요. 돈 벌어 올 때는 유세(有勢)하는 걸 참고 나 혼자 일했는데 이제는 돈도 못 벌어오니 일도 나누어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남편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바지런한 성격이에요. 항상 뭔가를 해야 해요. 나하고는 성격이 틀려요.”

그 말에 남편인 영감의 반응이 튀어나왔다. “그럼 나는 매일 ‘마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고 감사기도를 해야 하나? 이제 변호사님이 판결을 내려 보슈.” 이때 부인이 다시 반박할 눈치여서 내가 끼어들어 의견을 제시했다.

“두 분의 연세면 이혼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불간섭 평화협정서》를 쓰시면 어떨까요? 그걸 써서 두 분이 한 장씩 가지고 수시로 그걸 읽어 보면서 협정 내용을 지켜야 하는 겁니다. 필요하시면 제가 내용을 『법조문』같이 써 드릴게요.” “그거 괜찮네. 어떤 내용의 협정인가요?” 노부부는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이 됐다.

*제1조: 늙고 병든 서로를 이해하고 따뜻하게 감싸준다. *제2조: 일을 나누어 하고 그 결과를 보고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 *제3조: 서로의 가치관이 다름을 인정하고 자기주장만 옳다고 우기지 않는다. *제4조: 부부라고 하더라도 각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의 세계에 몰입하며 시간적·공간적으로 독립한다. “이 정도면 어떨까요?” 노부부는 모두 내 의견에 찬성했다. 덕분에 나는 삼겹살 파티에 초청받아 저녁을 잘 얻어먹었다. 

삼겹살집을 벗어나서 어둑어둑해지는 해변 길을 그 노부부와 함께 걸었다. 부인은 조금 앞에서 혼자 걷고 있었다. 남편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집사람이 많이 아파요. 내가 아내를 잘 보살펴서 하늘나라로 보내고 따라가려고 해요. 아내가 아프니까 성질을 내는데 나도 늙어서 그런지 참지 못하고 부딪치는 경우가 많아요.”

이 글의 내용 중에 영감님이 《시편 23편》을 ‘패러디(parody)’한 대화를 보면서 그도 ‘신앙인’임을 미루어 알 수 있었다. 이 노부부의 갈등은 어느새 80대가 된 문장로 부부를 포함하여 모든 노부부가 겪는 공통적인 문제가 아닐까 한다. 문장로도 금명간 ‘신앙적인 양심’을 바탕으로 위에 예시(例示)된 「법조문」을 참고해 『불간섭 평화협정서』를 작성해 보고자 한다.

문정일 장로

<대전성지교회•목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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