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와 천국의 길 걸은 순교자 최봉석 목사
십자가 복음 전파에 일생 바친 하나님 사람
하루는 부인이 면회를 왔다. 부인을 보고 눈인사를 하고는 “항상 기뻐하라!” 그러면 부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라고 대답했다. 이것이 면회였다.
그는 1944년 3·1절을 기해 40일 금식기도를 시작했다. 고문으로 몸이 약해진 데다가 70세가 넘은 고령으로 40일 금식기도가 끝난 4월 11일 병으로 쓰러져 결국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형무소는 “한국예수교장로회 목사 최봉석은 몸이 극도로 약해 건강해질 때까지 집이나 병원에서 기거하는 것을 허락하며, 보석 중에 어디서나 전도하는 일은 절대 금한다”라는 조건으로 그를 석방했다. 이리하여 최 목사는 감옥에서 평양 기홀병원으로 옮겨졌다.
링거 주사를 맞으려고 해도 가죽과 뼈가 마주 붙어서 바늘을 꽂을 수 없어 미음과 과일즙을 조금씩 마시게 했다. 위문객이 줄을 이었다. 병원의 장기려 박사는 최 목사의 안정을 위해 면회사절을 요구했으나 “장 박사, 그리 마시오. 나에게 오는 형제를 기쁘게 맞아 주는 게 도리요” 하고 문병 오는 사람들을 다 만났다.
1944년 4월 15일 오후 한 시, 최 목사는 가족과 교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에서 나를 오라고 전보가 왔구나!” 하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고생과 수고 다 지나간 후 광명한 천국에 편히 쉴 때 인애한 주 모시고 사는 것 영원히 내 영광 되리로다” 하고 부르던 찬송가 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얼굴에 웃음을 띤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유해는 19일 고등계 형사들의 눈을 피해 200여 명의 문상객이 모인 가운데 평양 돌박산 기독교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최봉석 목사는 학식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신학에는 관심이 적었고, 오직 기도와 전도에만 열중한 나머지 평양신학교에서 세 번이나 낙제했다. 그는 세속적인 성공이나 명예에는 철저히 무관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오직 혼을 꿰뚫고 영혼과 직접 통하기를 원했다. 전도하고 교회 세우는 일 외에는 모두 분토로 여겼다. 그는 27년간 전도했는데 만주에서 12년간 50개, 국내에서 15년간 30개, 합해서 약 80개의 교회를 세웠다.
최봉석은 1913년 평양 장로회신학교 제6회 졸업생 34명 중 하나로 졸업한 뒤 목사가 되었다. 그는 목사가 된 후 큰 도시에서 큰 교회를 맡지 못했다. 평안북도 강계, 초산, 위원, 벽동에서 전도목사로 사역했다. 그는 70여 교회를 설립하고 예배당을 지었다. 그는 한 교회에서 목회에 성공한 것은 아니나 여러 교회 개척자로 많은 일을 했다. 최봉석 목사는 말년에 평양에서 전도했다.
그는 찬송을 많이 불렀다. 특히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라는 찬송을 늘 불렀다. 전도 찬송이었다.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도 “고생과 수고 다 지나간 후”를 불렀다. 찬송은 매우 아름다운 기도였다. 성경을 다독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그는 성경을 인용하며 전도했으며,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암송했다.
그의 삶은 신학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사도 바울의 회개 과정을 밟았으며, 사도 베드로적인 전도자로 살았으며, 열두 제자 중 사도 야고보 같은 순교자의 길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의 신학은 회개와 천국이었다. 이것은 회개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확신했음을 의미한다. 이로써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을 이루어 갔다. 그리고 인생의 소망은 오직 천국이었다. 이런 점에서 길선주 목사와 같은 신학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최봉석 목사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초개와 같이 여기고, 복음을 위해 일생을 헌신했다. 그는 한국교회에서 신화 같은 존재이지만 역사 앞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그는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소리 높이 외치며 피 묻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힘껏 전한 순교자이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