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왕초거지의 초등학교 시절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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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무나 억울하고 분해서 울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과연 내가 양 사감의 말대로 전혀 희망이 없는 존재입니까?”

나는 그 날 밤 파도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주님의 인자한 음성을 듣고서야 정신이 번쩍 들어 일어났다. “염려하지 말아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너는 나의 사랑하는 자녀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주님의 음성은 나로 하여금 일반 학교로 가서 공부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게 했다. 내가 기도를 끝마치고 들어왔을 때 양 사감은 뭐하러 나갔다가 이제 오느냐고 책망했다. 나는 정직하게 하나님께 기도 드리러 갔었노라고 대답하고 잠자리에 누웠다.

다음날 아침에도 양 사감은 사사로운 감정이 남아 있었던지 나를 구타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이건호 장로님을 찾아가서 모든 일을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나는 양 사감이 이곳에 있는 한 학교를 떠나겠다고 말한 것이다.

김순옥 사모님은 눈물까지 흘리시면서 나를 위로해 주었다. 양 사감이 잘못된 일을 하고 있음을 소상히 알고 있으니까 곧장 조치를 취하겠다고 했다. 그 후에 양 사감은 김해 대저면에 있는 여자 시각 장애인만 있는 곳으로 보내졌다.

안마쟁이요!

내가 부산 송도의 라이트 하우스에 있을 때 겪은 또 하나의 일화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루는 이00 교사가 나를 불러서 “너 요즘 용돈이 없으니 한 번 송도 근방으로 나가 안마를 해볼 마음이 없느냐?”고 했다. 나는 귀가 솔깃해져서 그러겠다고 했다. 송도 고갯길에 있는 미진 호텔과 송도 호텔에는 미국 손님이나 일본 손님이 자주 머무는 곳이고, 그 근방에는 미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어서 꽤 번잡한 곳이었다.

1954년 어느 날 나는 난생 처음 안마하러 호텔로 나갔다. 호텔 방에 들어가니까 미국인 손님 옆에 한국 여자 분이 같이 있었다. 몇 마디 영어로 인사하고 안마하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으로 돈을 벌기 위해 안마를 해본 것이다. 그런데 그 미국인 손님의 몸집이 얼마나 크던지 우뚝 선 아름드리 나무처럼 느껴졌다.

나는 주어진 일이라서 있는 힘을 다해 한 시간 동안 정성껏 안마했다. 그러자 그 미국인은 원더풀을 연발했다. 그리고 콜라 깡통을 따서 한잔 마시게 한 다음 옆에 있는 여자에게도 한 시간 더 안마를 해달라고 부탁하기에 나는 다시 열심히 안마해 주었다. 그 미국인이 주는 안마 삯을 받아 보니 그 당시의 일반 요금보다 곱절이나 되었다. 그 일로 땀 흘린 보람이 큰 가치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다음날 아침 헌금할 돈을 따로 떼 놓고 나를 보내준 선생님께 쇠고기 몇 근을 사다 드렸다. 바로 그 날 그 선생님의 장인 어르신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번 돈을 기꺼이 모두 선생님의 장례비로 드렸다.

그 선생님은 또다시 나를 불러 놓고 비공식이지만 안마해서 학비를 벌어 중학교에 진학해야 된다고 일러주었다. 만일에 하급 학생이 상급 학생을 따돌리고 안마하면 반죽음을 당할 만큼 얻어맞는 일이 있음에도 그 선생님은 몰래 나를 소개해 주시곤 했다. 모든 것은 선생님이 직접 책임질 터이니 여름 방학을 이용해 송도 바닷가 옆에 있는 여관에서 돈을 벌어 보라는 것이었다.

대나무로 된 피리도 주셨다. 그 당시에는 피리가 시각장애인의 생명줄이기도 했다. 밤마다 주택가나 여관 혹은 호텔 근방을 돌면서 구슬프게 피리를 불면 “안마쟁이요!”라고 부르곤 했다. 나는 밤 9시가 되면 송도 바닷가 근방을 돌면서 피리를 구성지게 불었다.

그곳은 소문난 관광지였기 때문에 많은 시각장애인이 안마사로 돈을 벌기 위해 대나무 피리를 불며 여기저기서 몰려왔다. 처음에는 무척이나 쑥스럽고 창피하고 자신 없었으나 차츰 용기를 가지고 뛰어들다 보니 익숙해져 갔다.

송도 주위를 맴돌면서 나는 안마를 받으라고 대나무 피리를 열심히 불었다. 하룻밤에 안마 받는 사람이 많으면 네 명, 적으면 한 명 정도였다. 한 달 동안에 벌어들인 수입은 내가 난생 처음으로 거금을 만질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나는 도무지 돈에 대한 욕심이 없었던지 버는 대로 친구들과 함께 맛있는 음식과 과일과 과자를 사 먹었고 그중 십일조는 교회에 헌금했다. 방학이 끝날 무렵 송도의 관광도 철따라 끝나고 나의 주머니 속의 돈도 그와 함께 바닥나 버렸다.

나는 안마를 하면서 한 가지 깨달은 교훈이 있었다. 매일 밤 내게 안마를 시켰던 양 사감 덕분에 안마 기술을 터득했으나 나는 안마를 직업으로 삼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 당시에 방마다 술 파티다 담배 연기다 남녀간의 좋지 못한 모양들을 목격했기 때문에 자칫 나도 그와 같은 유혹에 걸려 실수할까봐 염려되었던 것이다.

김선태 목사

<실로암안과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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