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개신교 교인 수가 감소하는 추세가 지속되고 있어 걱정이다. 타 종교로의 개종자의 수는 증가 추세로 알려지고 있다. 그 이유가 뭘까?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어 있다. 참으로 마음 아프고 슬픈 일이다. 교회의 선한 영향력이 점점 축소되어 간다. 일제 식민 시대의 신자 수는 전 국민의 2%, 30여 만 명 정도였지만 사회적 영향력은 대단했다. 교회가 하는 발언은 다 정의롭고 나라를 사랑하는 것으로 받아 들여졌다. 3.1 독립 선언 대표 참가자 33인 중에 기독교 신자가 19명이었다. 교회는 세상의 신뢰와 존경을 받았다.
종교와 인간성을 박해하던 나치에 대항해 일어섰던 교회를 향해 아인슈타인(A Einstein, 1879~1955)은 다음과 같은 찬사(讚辭)를 보냈다. “자유를 사랑하던 나는 독일에 혁명이 찾아 왔을 때 항상 진리에 헌신한다고 자부해 온 대학들이 진리를 변호하기 위해 일어날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한 대학도 그러지 않았다. 모두가 즉시 입을 다물었다. 그런 뒤 지난 날 열정적인 논설로 자유에 대한 사랑을 외치던 일간지들의 저명한 논설위원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들도 대학들과 마찬가지로 불과 몇 주 만에 입을 다물었다. 그런 뒤 나는 독일인의 삶에서 자유의 가치와 소중함에 관해 그토록 많이 자주 글을 써내던 개인 작가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들도 벙어리가 되었다. 오직 교회들만 진리를 짓밟는 히틀러의 길을 막아 버티고 섰다. 나는 전에 교회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지금은 큰 애정과 존경을 드린다. 교회만이 진리와 도덕적 자유를 위해 일어설 수 있는 용기와 끈기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한때 내가 교회를 업신여겼던 것을 후회하며 이제는 기쁘게 찬송한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현대는 풍요의 시대이다. 교회도 예전보다 더 부유해졌다. 말씀도 풍년이다. TV 방송 설교를 날마다 들을 수 있다. 문제는 그 내용의 질과 수준이다. 정통 신앙이 아닌 것은 해악(害惡)을 끼치기 때문이다. 교회가 지혜로워져야 한다. 지도자는 물론 성도들도 영적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무조건 맹종(盲從)이 선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아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 때는 언제였는가? 지도자와 신자들의 회개가 이루어졌을 때였다. 교회가 하나님의 진리에 따라 살려고 힘쓸 때였다. 교회가 그 무엇보다도 영광 중에 계신 은혜의 하나님을 찾으려고 했을 때였다. 그러한 때에 교회는 연약함에서 벗어나 놀라운 영적 힘으로 선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교회가 교회답지 못해서 도덕적으로 힘을 잃고 있다. 교인 수의 감소 대책도 여기에서 찾았으면 좋겠다. 교회가 교회다울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신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형언할 수 없는 박해 속에서도 로마 제국을 진리로 정복했다. 종교 개혁 당시에는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붙들고 교회를 세울 때 능력을 발휘했다. 영국의 청교도 신앙의 부흥이나 미국의 18세기 조나단 에드워즈의 대각성 운동, 1907년 평양의 대부흥 운동도 마찬가지의 역사를 보여 준다. 기독교는 반드시 회개와 헌신을 요구한다.
지금 교회가 위기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의 시기이자 도전의 시기이다. 위기는 기회가 될 수 있다. 타락하고 세속화 되어가는 한국교회, 다시 한 번 그 순결함을 찾아야 한다. 종교 개혁 당시의 개혁주의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오직 교회다운 교회가 되어야 한다. 지도자들의 각성이 절실히 요청된다. 이는 시대적 요구이다. 하나님의 명령이다. 역사에 황금 시대는 없다. 나름의 어려움은 항상 있어 왔다. 다만 교회는 그 정체성(正體性)을 지켜야 한다. 예수님 앞에 서 있어야 한다. 이것이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비전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