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신앙의 기원과 내용 <4>
신약성서에서 우리는 예수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파 사람들과 논쟁한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일곱이 다 상속자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막 12:18-27) 여기서 부활은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로써 본문은 부활을 단순히 지상적인 생명으로 회복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태도를 거부한다.
공관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묵시주의자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처럼 종말에 죽은 자들이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보여주었다. 부활은 의로운 자들만이 아니라 죄인들에게도 일어난다. 예수에게도 종말에 일어날 부활 신앙은 하나님의 신실함과 능력에 대한 믿음의 결과다. 그리고 부활의 생명은 지금까지 영위해 온 생명의 단순한 연속이 아니라, 그것과 완전히 다르다. 하지만 여기서 예수는 하나의 새로운 이론을 선포하기보다는(비록 논쟁의 대상이 되고는 있지만) 그 당시에 널리 퍼져 있던 신앙의 확신을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예수가 선포하고 자신 인격 안에서 실증하고 인간들에게 가까이 가져온 새로운 현실은 하나님의 나라(통치)였다.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세력들은 힘을 잃게 되었고, 죽음도 힘을 잃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마지막 날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며, 개인이 죽을 때에 비로소 시작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지금 생명을 변화시킨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극복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반인간적인 세력들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며, 예수가 가져오는 새로운 삶, 곧 신뢰와 사랑의 삶으로 인도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죽은 자를 살리며(막 5:22 이하, 요 11:1 이하), 병들고 귀신들린 자를 고친다. 그리고 예수는 열두 제자들에게도 이런 임무를 부과한다. 여기서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은 하나님의 나라 선포의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신앙은 특히 예수의 부활을 통해 강력한 힘을 얻게 되었다. 하나님은 죽음을 극복했고, 죽음에 대해 승리를 획득했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한 신약성서의 입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의해 온통 결정된다. 따라서 바울도 묵시문학적 표상이 아니라 바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근거해 죽은 자들의 부활을 강력히 기대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점점 더 지연되고 그리스도인들이 계속 죽어가는 현실에 당황하던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에게 바울은 부활의 희망을 강하게 선포한다. 이미 죽은(잠든) 자들은 살아 있는 자들보다 결코 불리하지 않다. 주님이 강림하실 때,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자들은 살아 있는 자들보다 먼저 일어날 것이다. 부활은 예수의 운명, 곧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의 운명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부활한 예수를 통해 죽은 자들을 영광의 부활로 인도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말로(이러한 희망으로) 서로 위로해야 한다.(살전 4:13-18)
“부활이 없다”라고 주장하는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바울은 부활을 다시금 힘차게 변증한다. 이 본문의 배후에는 아마도 현재의 구원에 집중함으로써 역사를 무의미하게 생각하는 열광적인 집단이 존재할 것이다. 이 집단은 신앙을 내면화함으로써 구원의 육체성을 부인했다.
이신건 박사
•서울신학대학교 교수(전)
•생명신학연구소장(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