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적 부활 : 현재적 종말론<1>
앞에서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성서는 대개 역사적으로 결정적인 전환기, 곧 역사의 종말에, 특히 신약성서에서는 예수의 최종적인 재림(파루시아) 때에 일어날 죽은 자들의 보편적인 부활을 기대한다. 그러나 성서에는 이와 같은 미래적, 종말론적 부활 기대와 정반대로 현재적, 순간적 부활을 기대하는 본문도 적지 않게 발견된다. 특히 요한복음에서 그러한 관점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비록 요한도 현재의 삶이 미래에 완성될 것을 기대했지만, 묵시문학적 종말론처럼 우주적 대변혁을 기대하지 않았다. 요한은 바울도 여전히 간직하고 있던 기대, 곧 장래의 우주적 사건에 대한 기대를 포기했다. 요한에게 죽은 자의 부활과 최후의 심판은 이미 현재적이다. 요한의 현재적 종말론은 다음과 같은 구절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4-27) 등을 통해 가장 분명하게 표현된다.
요한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생명을 잃어버린 자요, 믿는 자는 이미 영원한 생명 가운데서 살아 있는 자다. 이런 생명을 가진 자의 육체적 죽음은 의미가 없다. 모든 사람은 영생과 심판을 결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요 3:5 이하, 5:24) 복음은 보편적인 것이고, 영원한 구원과 영원한 심판은 현재적이다. 현재는 나중의 성취를 위한 하나의 전 단계가 아니다. 요한에게 구원은 상실될 수 없는 하나님과의 사귐, 하나님과 함께 불멸하는 것,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하나님의 영광과 빛 속에 머무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물론 요한에게도 개인적인 미래, 곧 지상의 생명이 끝난 다음에 신자 개개인에게 다가올 구원을 기대하는 구절이 나온다.(요 14:2 이하, 17:24) 죽음은 멸절이 아니라(요 11:25-26) 세상을 등진 후에 들림을 받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단지 구원으로 인도하는 예언자보다 더 큰 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은 미래적 종말론을 억제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미래적 종말론은 하나님이 아들의 표상을 침해하기 때문이다. 아들은 위로부터, 하늘로부터 오셨다.(요 3:31) 그의 나라는 죽어야 할 이 세상에 속한 것, 곧 이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요 18:36) 예수의 파송은 이미 그 자체로서 예수의 재림이다.(요 3:17 이하, 5:24 이하) 이런 점에서 요한은 예수의 재림을 새롭게 재해석했다.
특이한 점은 묵시문학적 전통에 따라서 미래적, 종말적인 보편적 부활을 가장 열렬히 기대했던 바울의 여러 서신에서도 현재적 부활 신앙을 표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 3:1)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따라서 불트만(R. Bultmann)은 특히 요한복음의 관점에 따라서 종말과 부활을 철저히 현재적 사건으로 해석한다. 불트만에 따르면 성서에 기록된 많은 사건들은 객관적, 문자적인 설명이 아니라 신화를 사용해 표현된 것이다. 더욱이 성서의 신화적 표현은 현대인에게 무의미하다. 하지만 불트만은 신화를 제거하기보다는 신화의 배후에 있는 더 심원한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이를 위해 불트만은 실존주의 철학, 특히 하이데거(M. Heidegger)의 철학적 개념을 이용했다.
불트만에 따르면 매 순간은 종말론적이다. 매 순간은 하나의 종말론적 순간이 되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에서 이 가능성은 실현된다. 역사의 의미는 항상 현재에 있다. 그리고 이 현재가 기독교 신앙에 의해 종말론적 현재로서 파악될 때, 역사의 의미는 비로소 실현된다. 항상 현재 속에 역사의 의미가 있다. 매 순간 속에 종말론적인 순간이 되는 가능성이 잠들고 있다. 우리는 이를 불러일으켜야 한다. 인간이 하나의 궁극적으로 의미 있는 결단을 하는 순간은 언제나 종말론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신건 박사
•서울신학대학교 교수(전)
•생명신학연구소장(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