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순교자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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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유교 집안에서 기독교 신앙으로 변화

선천 선교부와의 만남, 기독교 신앙 받아들여

김석창(金錫昌)은 1876년 12월 21일 평안북도 철산군 여한면 연수동의 가난한 가정에서 아버지 김원옥과 어머니 밀양 박씨에게서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였다. 한때 경상도 경주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김석창이 태어났을 때 그의 가정은 가난했고, 양반도 아니었다. 아무런 소망이 없었다. 그렇다고 특별한 종교적 신앙도 없었다. 조선에서 평범한 가정도 아니었다. 공부해도 뚜렷한 지위를 얻을 수 있는 것도 안되었다. 그러나 다른 아이들이 다니는 서당에 다녔다.

어렸을 때 마을에서 경영하는 한문사숙(漢文私塾)에서 천자문(千字文)과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었다. 당시의 천자문은 모든 향교와 개인 사숙에서 밥벌이를 위해 학교 기초교육으로 문자를 암기식으로만 가르치는 교재가 아니었다. 이는 인생을 살아가는 데 바른 삶을 살도록 하는 내용으로, 오랫동안 사숙에서 사용한 교재였다.

천자문은 한 면에 8글자로 이루어진 125개의 문장으로서, 이 문장을 통해 우주의 이치와 인간의 도리를 깨우치기 위해 만들어진 인문학적인 요소가 가득 담긴 책이며, 논어(論語)에서 주역(周易)까지 3천500년 동안의 동양철학을 총망라한 인간교육을 위한 최고의 고전입문서였다. 그러나 그는 막연하게 서당의 훈장이 가르치는 대로 배웠다.

김석창은 어릴 때 이미 인간의 귀중함과 윤리 도덕의 기초를 잘 다졌다. 석창은 인간의 도리를 배웠으므로 성장해서 서당에서 훈장을 했다. 유학의 교육은 조선 500년 동안 힘있게 이어왔다. 이 유학은 사실 조선 500년 시대에 유일한 도덕이요, 종교였다. 석창은 이것을 아무런 생각 없이 배웠고, 그렇게 가르쳤다. 당시에는 이것이 한 인간의 삶이었다.

가정에서는 아버지와 함께 농토를 일구었다. 그리고 사회의 전통에 따라 나이가 되어 고향에서 결혼했다. 누구의 제의였는지 알 수 없으나 철산 구석에서 선천으로 이사했다. 특별한 계획이 있어서 이사한 것은 아니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선천은 그의 가정에 새로운 빛이 비치는 곳이었다. 

이미 이곳 선천에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자리를 잡고 선교에 열중하고 있었다. 청년이 된 김석창은 자신은 원하지 않았으나 새 세상을 만난 것이었다.

그것은 역사의 흐름이었다. 때마침 선천 선교부에서 선교에 힘을 쏟고 있는 위대모(Rev. Norman C. Whitmore; 魏大模)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였다. 그는 위대모 선교사에게 전도를 받았다. 그리고 그길로 부모와 함께 온 가족이 예수를 믿었다. 위대모 선교사의 안내로 그들은 선천읍교회에 출석했다. 김석창은 부모보다 열심히 믿었고 확신에 이르렀다. 

김석창은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였고 하나님께서 택하셨으므로 배운 것에 머물지 않고 확신의 신앙을 갖게 되었다.

막연하게 유교의 영향을 받았던 김석창이었다. 천자문과 사서삼경을 배웠으므로 유교의 철학에 물들어 있었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로 곧 기독교 신앙인이 되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믿었고, 위대모 선교사가 가르치는 새로운 성경의 진리를 알게 되었다. 위대모 선교사는 김석창을 유심히 보았다. 김석창은 서당의 훈장도 해서 사람을 가르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위대모 선교사에게 교회의 조사로 인정받아 전도인이 되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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