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 행복한 선택  박래창 장로의  인생 이야기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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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선교, 믿음으로 돌파한 진퇴양난의 순간

중국 선교 향한 도전과 돌파구 모색

위기와 갈등 속에서 빛난 믿음의 결단

“중국 선교는 중국 최고위층 지도자와 접촉해서 돌파구를 찾는 게 중요합니다. 중국 고위층에서 ‘니고데모’를 찾는 것입니다. 이 일이 좋은 계기가 될 것 같네요.”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훌쩍 해외 집회를 떠나버리셨다. 유 장로와 나는 마주보고 “큰일났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필요한 곳마다 유능한 인재가

맡겨진 이상 어떻게든 움직여야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일단 우리 교회의 국제관계 전문가들을 찾아가 자문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들 역시 부정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얻은 정보라고는 그나마 “요즘 중국 정부 내 각 부처와 단체, 공산당 군부까지도 여행사를 운영한 수익금으로 부서의 운영 비용을 충당한다”는 정도였다.

정확히 알아보니 우리에게 의뢰가 들어온 곳은 해외 대사를 역임한 은퇴 외교관들의 모임인 중국외교관연합회(CIFRA) 산하의 여행사였다. 우리가 40만 달러를 지불하면 그들이 중국에서 부흥회를 열 수 있도록 만 명을 동원하고 그 비용 안에서 수익을 남긴다는 것이었다.

내막을 알게 되니 조금 안심은 됐다. 최소한 유령단체의 사기성 제안은 아닌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목사님 말씀대로 이 일로 중국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이뤄지도록 참여해보자’는 생각도 들었다.

이후 본격적으로 일이 추진됐다. 반대하는 소망교회 당회를 설득하느라 진땀을 뺐고, 400명의 방중단을 모으기도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돈 문제가 컸다. 먼저 중도금으로 중국에 10만 달러(9천만 원)를 송금해야 했는데 당시로서는 중국에 돈을 송금하는 자체가 여간 까다롭지 않았다. 정상적인 경로로는 송금하는 데 한 달도 더 걸린다고 했는데, 그러면 기한을 맞출 수가 없었다.

만나는 장로와 집사마다 붙잡고 어려움을 호소한 끝에 베이징에 제일은행 지점 개설을 위해 나가있던 소망교회 박응복 집사와 전화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저희 은행 본점으로 돈을 보내시면 제가 여기서 직접 전달하는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라고 했다. 마침 소망교회 집사님들 중에는 제일은행 본점 임원도 두 분이나 있었다.

‘이렇게 하면 해결이 되겠구나’라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전화를 끊었는데, 문득 생각하니 1억 원이라는 돈이 준비돼 있지 않았다. 약속한 송금일까지 남은 시간은 불과 닷새였다.

교회에서 중국 행사에 대한 재정을 의논하고 있는데 정 장관에게 나를 소개한 사람으로 밝혀진 한양대 의과대학 교수 김태승 집사(현 소망교회 은퇴장로)가 보이기에 지나가는 말로 재정 걱정을 했다.

“아무래도 김 집사가 일을 벌였으니 김 집사 집을 팔아야겠네.” 농담조로 가볍게 건넨 말인데 김 집사는 자못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며칠 후에 부부가 나를 찾아왔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를 팔고 구리 쪽으로 전세를 얻어 가면 1억을 헌금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중학교 다니는 아들이 전학 갈 학교까지 알아봤다고 했다. 나는 깜짝 놀라서 “그 말을 진심으로 들었단 말이야?”라고 물었다. 그들 부부의 순전한 믿음이 놀라웠다.

이 일은 내게 큰 도전이 됐다. 집에 들어가 아내에게 김 집사 이야기를 전했다. 나만큼 놀라워하고 감동을 받은 기색이었던 아내는 한참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4년 동안 불입한 적금이 모레 만기가 돌아오는데 딱 1억 원이에요.”

할렐루야!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거요. 그 돈을 우선 씁시다.”

그동안 살뜰히 모아온 아내에게는 미안하지만 워낙 사정이 다급했던지라 그렇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고 아내는 고맙게도 흔쾌히 좋다고 해 줬다.

그렇게 해서 중도금을 해결했다. 그런데 또 일이 터졌다. 원래 우리와 계약하고 일을 진행했던 기관이 떠나기 며칠 전 중국외교관 연합회(CIFRA)에서 다른 곳으로 바뀌었다는 것이었다. 장쩌민 주석의 의전 담당 법률 비서 등이 직접 관장하는 정부 산하 팀으로 바뀐 것이다.

왜 그랬는지 설명도 없고 영문도 알 수 없었다. 이들은 자기들 요구사항을 일방적으로 전달하기만 했다. 그 내용도 그냥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것들이었다. “행사 진행 사회를 중국 측이 한다”, “성가대는 설 수 없다. 찬양도 할 수 없다”, “정근모 장관과 곽선희 목사의 강의만 허락한다” 등이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교회 내의 반대 의견은 더욱 거세졌고 곽 목사님까지도 망설이는 눈치였다. 가서 사기를 당할 수도 있고, 베이징 공항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올 가능성도 있다는 의견까지 나왔다. 이미 항공편 예약이 완료됐고 취소할 형편도 아니었기에 참으로 난감했다. 이런 진퇴양난의 사태에 대해 행사를 반대했던 이들은 고소해했고, 열심히 준비한 이들은 초조해졌다. 새벽기도 때마다 중국 대회를 위해 기도했고 장로님들 역시 주일예배 대표기도 때마다 대회를 위한 기도를 빠지지 않고 넣었다.

그런데 출발을 한 주 남긴 시점에서 곽 목사님이 “주일2부 예배부터 기도문에서 중국 행사 내용을 빼라”고 말씀하셨다. 안 가는 쪽으로 결심이 서신 것 같아 더욱 불안해졌다.

주일 저녁 예배가 끝난 뒤 열심히 준비에 참여했던 집사들에게 등 떠밀려 목사님 방에 들어갔다.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고하고 “어떻게 할까요?” 물었다. 출발 딱 3일 전이었다.

경험상 복잡 미묘한 상황일수록 특유의 절묘한 판단을 하는 곽 목사님이기에 그 대답에 따르기로 마음을 비운 채 기다렸다. 잠시 생각하던 목사님은 “그래, 갑시다!”라고 말씀하셨다. 모든 고민에 종지부를 찍어주신 것이다.

박래창 장로

<소망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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