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물이야기] 어머니의 ‘거룩한 협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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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태,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의 종으로 바치겠습니다”

나는 1958년 경주 인근의 조그만 마을에서 2남 5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어머니 김성조 권사님은 3대째 내려오는 믿음의 집안에서 자란 독실한 크리스천이셨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신 분이다. 어머니는 자식 중에서 목회자가 나오기를 간절히 소망하셨다. 그래서 연속으로 딸 넷을 낳았을 때, 아들을 주시면 주의 종으로 바치겠다고 하나님 앞에 서원했다. 

나를 낳은 후, 어머니는 은혜 ‘은(恩)’, 태 ‘태(台)’라는 이름을 지어 주셨다. 은혜의 태, 즉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아들이라는 뜻이 담긴 이름이다. 그래서 나는 어릴 때부터 “너는 커서 목사가 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벌 받는다”라는 거룩한 협박을 받으며 자랐다. 어른이 되면 당연히 목사가 되어야 하는 줄 알았다.

1960년대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우리 집도 몹시 가난했지만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부해서 출세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철저히 신앙 중심으로 자녀들을 교육하셨고, 매일 새벽 기도를 다니시며 자식들이 믿음 안에서 바르게 자라도록 기도하셨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나는 그야말로 천둥벌거숭이처럼 지냈다. 엿장수에게 고물을 갖다 주면 엿과 바꾸어 먹을 수 있었는데 그 재미에 푹 빠졌던 나는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가방은 교실에 던져 놓고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고물을 주우러 다녔다. 그러다 보니 성적은 언제나 바닥이었고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다. 가난하고 못생기고 공부까지 못했던 나는 학교에서 왕따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런 나를 야단치거나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지 않으셨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야 한다는 점만 강조하셨다. 그때 어머니는 십 리나 떨어진 옆 마을 교회를 개척해서 섬기고 계셨다.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집들을 찾아다니며 사람들을 전도해서 세운 작은 교회였다.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도 교인들에게 나눌 떡을 만들어서 머리에 이고 십 리 길을 걸어가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어머니는 마을 사람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셨고, 매일같이 예배를 인도하고 돌아오셨다. 목회자가 된 나조차도 그때 어머니가 보이신 신앙과 믿음을 따라가지는 못할 것 같다. 그렇게 우리 칠남매는 어머니의 신앙 교육 안에서 성장해 갔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나와 달리, 형은 공부를 잘했다. 형은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서울에 올라가서 고학했고 명문 대학에 입학했다. 형은 신문 배달과 과외를 하면서 동생들을 서울로 데려와서 공부시켰다. 나중에는 가족 전체가 서울로 오게 되었다.

그때 나는 중학교 1학년을 마친 상태였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바로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쉬고 있었다.(계속)

이은태 목사

 뉴질랜드 선교센터 이사장

 Auckland International Church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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