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여정] 노스탤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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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향은 수몰지구로 지금은 없어졌지만 벽지의 오지인 말하자면 좁고 깊은 산골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답답하거나 궁벽한 곳은 아니었다. 주위의 자연 경관이 주는 풍치와 환경적 요소가 되는 지형지물이 알맞게 자리한 참으로 포근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주는 그런 곳이었다.

그리고 순하고 근면한 마을 사람들이 비옥한 농토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부지런히 농토를 개간하며 서로의 화목을 도모하며 내일의 소박한 꿈을 키우는 그런 곳이었다.

하천 지류들이 발달해 산골이지만 밭농사나 유실수들을 작황하기에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집을 조금 벗어나면 동네 우물이 위치해 있고 습지에 전형적으로 기생하는 작은 풀숲과 돌미나리 같은 앙증맞은 식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물가에는 작은 실개천의 지류가 연계되어 있었다.

그리고 백일홍 같은 여러해살이의 나무들이 알맞은 조경으로 위치하고 있는 그야말로 여느 농촌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곳이었다. 실개천을 따라가면 조금 넓은 도랑이 나오는데 방과후면 친구들과 방게나 가재 잡기와 작은 물고기들 잡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리고 또래들과 종일 어울려 놀다가 얼굴 씻고 발 씻고 가기에는 너무나 유려하고 맑은, 말하자면 우리들의 쉼터였다.

어른들을 따라다니며 다슬기와 버들치, 그리고 갖가지 민물고기를 잡는 것은 그렇게도 좋을 수가 없었다. 특히 물 맑은 일급수에만 사는 다슬기 맛을 나는 이때부터 좋아해서 지금도 여러 곳을 여행하다가 다슬기 식당이 있으면 어김없이 들러서 식사를 하며 그 옛날 소싯적의 분위기를 만끽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린 철부지 시절엔 가까운 산의 작은 구릉이나 동산, 그리고 실개천 주변이나 학교 운동장이 주 놀이터가 된 셈이다. 그리고 겨울엔 썰매타기와 얼음지치기로 하루해를 보내며 즐거워하기도 했다.

아랫마을 40여 가구 윗마을 30여 가구가 되는 작은 동네는 모두가 일가친척처럼 교분이 두터웠고 심지어는 그 집의 행사나 제사날도 외울 만큼 어른들은 화목을 도모하며 다들 스스럼없이 지내고 있었다.

우리집은 윗대부터 지주로 땅을 많이 가지고 있었고 일부 소작인들을 두고 있는 부농으로, 그리고 학식과 덕목이 있는 조상님들이 관계에 근무하고 있던 터라, 동네에서 소위 유지로 통하고 있는 존경의 대상으로 나는 철부지 시절을 남다르게 조금은 우쭐대며 자신있게 지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덧붙여 말하자면 학문하는 할아버지, 아버지를 둔 덕분으로 언제나 또래들의 대장이 되어 부러움의 대상으로 의기양양하게 지냈다.

그리고 여기서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정신의 안정과 정서의 순환에 크나큰 영향을 준 자연 환경을 다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금강의 지류인 새끼강들이 지나고 있어 갖가지 다양한 수목들과 물안개, 그리고 노령산맥의 힘찬 능선들로 이루어진 비경들이 한 폭의 산수화를 보듯 일품이었다. 마치 선경 그 자체였다.

이러니 산과 강, 능선이 조화가 되어 하루에도 기온의 변화에 따라 몇 번씩 그 풍경을 달리해 어린 마음에도 동화에서나 나오는 하늘나라 같았다. 소싯적엔 또래들과 어울려 가까운 산등성이에서 사철 달리하는 풍경 속에서 어울렸다. 더러는 덫을 놓아 다람쥐 잡기와 산새 알을 줍기도 하고, 여름이면 근처에 산재한 하천의 지류에서 저물도록 어울려 멱 감고 고기잡이 놀이로 소일하며 어둑해서야 집에 돌아오기 일쑤였다.

지금 고희가 지난 이 나이에도 일주일에 두세 번씩 일정하게 젊은이들과 어울려 등산을 하고, 또 일정한 날에 골프 동호인들과 어울리며 또 출근해서 회사 일을 챙겨도 아직도 큰 피로를 모르는 것은 이때에 다졌던 체력의 힘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한번은 또래의 친구들과 동리에서 몇 마장 떨어진 수박밭에 서리를 하는 동안 나는 망을 보느라 정신이 없는 사이, 그만 들쥐잡이용 틀에 걸려서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나의 외마디 비명소리에 같이 서리 간 친구들이 줄행랑을 치고 나 혼자 남아 덜덜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겨우 낮은 포복으로 수박밭을 헤쳐나오고 보니 온몸에 땀이 후줄근해서 참으로 꼴불견이 아닌가. 더구나 유월 염천이라 얼굴에 묻은 흙과 땀범벅이 된 내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방향감각을 잃고 흙탕물이 된 옷을 씻을 데가 없나 하고 조심스레 살피는데, 그래도 안심이 안되었는지 멀리서 나를 부르는 친구들의 소리를 귓전에 들으며 겨우 어림짐작으로 수박밭을 헤쳐나와 친구들을 만나 부둥켜 얼싸안고 무사안녕을 좋아라 하던 생각이 난다. 말하자면 추억 속의 개구쟁이 시절이었다.

여느 시골은 어릴 때면 술래잡기와 제기차기, 자치기 등으로 시간을 보냈겠지만 우리 마을은 면에서 두 번째 큰 마을이라 구릉이나 작 은 동산, 실개천 등이 잘 발달하고 있어 산경을 사철 벗삼아 그때마다 적당한 놀이로 소일했고 서로의 정이 두터워 싸우거나 반목하는 일이 거의 없이 지낸 것이 좀 특이한 점이다.

더구나 마을 대항 무슨 놀이라도 하면 1, 2등을 놓치지 않는 단결심을 가진 마을이다 보니 어른들 사이가 워낙 돈독했고, 서로를 보살피며 아끼는 위계질서가 동리의 화목 중심이 되다 보니 우리 또한 닮지 않을 수 없는 씨족사회처럼 훈훈하고 온후한 분위기 속에 성장하는 바탕이 되었다.

언젠가 보은을 지나면서 회남 땅을 밟으니 이미 수몰지구가 된 고향 마을의 물결 무늬들이 옛이야기의 동화처럼 나를 보고 손짓하는 것 같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차창 밖을 뒤로 내 나이만큼 흐르는 그 물속에 내 동심 또한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으리라.

양한석 장로

• 문현중앙교회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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