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저일 생각하니] 오 집사 내 밑에 부목사가 되시오 신학은 내가 시키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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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3월 조그만 집으로 내집을 마련한 나는 강서구 화곡본동에 자리잡았다. 한 2년 다니던 마포구 아현동 산칠교회를 더 다니다가 1975년도 5월 경 화곡초등학교 앞에 있는 화성교회에 등록했다. 미등록하고 2달간 다닐 때 화곡초등 4학년 장남 오안열 군이 학교 앞에서 놀다가 오른팔 팔꿈치를 다쳤다. 교회 근처 동네 정형외과에 갔더니 의사는 공포에 사로잡히는 수술이야기를 했다.

나와 아내는 시내로 가기 위해 교회 앞 정류장에서 심방 중 귀가하시던 장경재(1918-2001) 화성교회 담임목사를 만났다. 어디 가느냐 물으셨다. 시내 정형외과로 아들 다친 팔 때문에 막연히 시내로 가려한다고 말씀드렸다. 그럼 내가 아는 영등포경찰서 앞 노명덕정형외과로 가자했다. 우리 내외는 아들을 데리고 영등포경찰서 앞에 있는 노명덕정형외과로 갔다. 키가 훤칠하고 몸매 건장한 노명덕 의사는 아주 친절한 의사였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인이었다. 아들의 오른팔 팔꿈치를 몇 장 뼈사진을 찍고 좀 있다 장목사와 우리 부부를 사진 암실로 불렀다. 그리고 찍은 뼈사진을 기계에 펼쳐보이며 두 달 정도 팔에 붕대감고 치료하면 낫겠다고 했다. 

우리 부부는 속으로 동시에 “아,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기도가 넘쳤다. 좀 전에 수술공포감을 주던 병원의사와는 180도 다른 안정감을 주는 진찰결과를 노명덕 박사에게 말하게 하신 하나님이 무한히 감사했다. 오안열 아들은 화성교회 주일학교에서 배우고 고교 대학을 거쳐 성경 주석의 제일인자 박윤선(1905-1988) 목사님이 “바른신학 바른교회 바른생활” 3대 교육이념을 세우시고 설립한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17회 졸업생이 되었다. 오안열은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사이판 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로 2000년 전후에 10년간 시무하며 중국 동북삼성 전초기지 교회로 든든히 터를 닦아놓고 귀국했다. 

빅윤선 목사님의 신학교 수제자이신 장경제 목사님은 만주 봉천(현 심양)에서 신앙생활 하실 때 신사참배 철저히 거절하고 귀국 평양에서 목회할 때 주일날 김일성 투표 반대해 공산당 핍박을 받다가 1947년 8월 신앙의 자유 찾아 월남하셨다. 

만주 신학교에서 뵈었던 박윤선 목사님 을 부산고려신학교에서 5대 교장으로 다시 뵙고 신학공부 하신 후 경남 진해 마산 밀양 등지에서 목회하시다가 상경하시어 1967년 8월 김성실 권사와 함께 오늘의 화성교회를 개척하셨다. 화곡동 화(禾)자와 김성실 권사의 성(成) 글자를 합해 화성교회를 25년간 목회 하시며 든든히 부흥발전시켜 놓으시고 은퇴하셨다.

내가 뵙기엔 사랑과 눈물과 기도가 많으신 소탈하신 장경재 목사님. 나는 목사 중에 으뜸 모범목사님으로 존경하는 장경재 목사님의 신앙교육을 철저히 받은 오안열 목사는 지금 부산 가야로교회 담임목사로 잘 시무하고 있다. 장경재 목사님이 나와 아내가 교회 등록하자마자 고등부 반사로 임명해 주셨다. 나를 데리고 며칠간 심방을 다니신 후에 목양실에서 나를 보고 “오 집사 내 밑에 부목사를 하시오 신학은 내가 시키겠소” 내가 미처 생각지도 못한 고마운 말씀을 하셨다. 나는 “신앙의 소명감이 없고 믿음이 부족해 목사자격이 안 되는 사람이어서 평신도로 장 목사님을 잘 모시겠다”고 사양하는 대답을 드렸다. “대학교수가 되고자 하오니 기도해 주세요”라고 말씀 드렸다. 그 후 더 이상 말씀이 없으셨다. 내 대신 아들, 사위가 목사되고 딸이 선교사로 잘 시무하고 있다. 장로 피택이 되어 장로가 된 나는 시무장로로 장 목사님을 존경하며 재임기간은 물론 은퇴 소천 후까지 신앙의 아버지로 장경재 목사님을 존경하며 기도로 잘 모시고 있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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