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순교자들 (4) 김익두  목사 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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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 한국교회의 부흥 이끈 김익두 목사

성령의 역사•민족의 희망이 된 부흥운동

다음날 부흥 집회에도 이들이 몰려와서 “김익두를 끌어내려라”, “박애헌(용정교회 당회장) 목사를 끌어내려라” 등 공갈 협박을 자행했다. 심지어 폭도들은 강단에까지 올라가서 설교하던 김익두 목사를 비롯해 캐나다 선교사 로스 목사와 장로들을 철봉으로 구타했고, 교회당 기물을 함부로 부수는 만행을 거듭했다.

그러나 부흥회는 계속되어 매일 600~700명이 모여 격렬한 설교를 들은 결과 새 신자와 믿음의 신자가 많이 있는 중에 금주, 금연한 자도 있었다. 또 예배당을 증축하기 위해 500여 원을 연보했고, 믿음으로 병을 고친 자도 많이 있었다.

그가 담임했던 남대문교회의 지식층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그가 기독교 신앙을 미신적 신앙으로 끌어내리고 병을 고친다면서 우매한 자들을 미혹한다고 매도했다. 

이는 확실히 반기독교 운동이었으며, 엄연히 성경에 기록된 성령치유의 은사를 정면으로 거절한 위험한 자유주의신학의 물결이 교회 안에 침투해 들어오고 있는 증거였다.

일제의 억압 속에서 암울한 시절을 보내고 있던 대중들에게 김익두 목사는 그 초자연적 성령의 역사를 통해 한국교회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3·1 독립운동 후 희망을 잃은 민중들의 삶에 용기를 불어넣어 준 그 시대의 예언자였으며, 그 시대에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보내주신 위로의 메신저였다.

그가 이끈 부흥 집회 수가 776회요, 설교 횟수가 2만 8천 회, 교회 신축이 150처, 그의 감화로 목사 된 사람이 200명, 치유받은 자가 1만 명이 넘었으니, 그의 생은 한마디로 ‘복음을 위한 삶’이었다.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는 한국교회에 새로운 형태를 창조했다. 그 원인이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김익두 목사의 신앙형태에 원인이 있었다. 그는 열정적이었고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를 많이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성격적인 면에서 열정이 솟아났다. D.L. 무디에게서 볼 수 있었던 큰 능력이 나타났다. 그것도 그의 성격과 그의 신앙적 노력이 분명하게 나타났다.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가 미친 역사적 의의에 대해서 민경배 목사는 《일제하의 한국기독교 민족 신앙운동사》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역사 자체에는 주기를 전진과 창조의 돌파력으로 전환시키는 잠재력이 전능자로부터 주어져 있다. 1920년대의 위기를 새 희망과 창조적 동력으로 전환시킨 거대한 섭리의 손길이 김익두 목사에게서 나타났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하고 싶다. 교회나 선교 상황 보고서 어디를 찾아보아도 그 당시 김익두 목사가 끼쳤던 엄청난 정신적 영향에 버금할 만한 운동이나 인물에 대한 지시가 없다. 김익두 목사가 시대적 새 기운이 정신적인 것에 대한 현저한 환기로 가득 차고, 전례 없이 복음에 압도되는 민심의 향방에 앞장서 그 파급을 지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로교에 진흥 운동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의 격류 속에서 그 위치가 잡혔던 한 흐름이었다.”

우리 교회사에서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 한 선교사는 말했다. “우리는 주님께서 조선 땅에 바울이나 베드로와 같은 사도를 일으켜 백성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증거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오랫동안 간절히 기도해 왔다. 이 무거운 책임의 자리에 우리 주님께서 김익두 목사를 세우신 것이 확실하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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