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광장과 거리에는 대통령 탄핵 찬반(贊反) 집회가 뜨겁다. 어려운 시대이다. 이 어려운 시대를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하게 한다. 헌법은 국가의 기본법이다. 헌법재판소는 헌법 수호를 담당하는 최고의 권위를 가진 국가 기관이다. 재판이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헌재의 재판관 처단과 판결에 불복해야 한다는 주장과 선동, 심지어는 헌재를 부셔 버리자는 폭언까지 나오고 있어 섬뜩하다.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민주주의의 꽃은 선거이다. 선거에 의해서 권력이 부여되고 위임된다. 일부 정치 세력이 부정선거론에 함몰(陷沒)되어 선관위에 불복하는 주장과 선동이 거침없이 나온다. 선관위도 부정하고 부셔버리자고 선동한다. 대법원 판결이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불복하려 든다. 극히 일부 목사들의 이런 선동과 주장에 일부 성도들이 좀비(Zombie)처럼 동조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성(理性)이 아니라 감정이, 논리가 아니라 폭력이 사회 분위기를 지배하려 한다. 이런 주장대로 헌재와 선관위, 대법원의 권위를 부정하고 무시한다면 국가의 기본 질서가 유지될 수 있겠는가? 국가의 기본 질서가 무너진다면 무정부 상태, 무법 천지가 되고 말 것이다.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목사와 성도들이 이런 선동과 주장에 동조해 헌법을 무시하고 국가 기관의 권능을 부정하며 사회 혼란을 부추긴다면 과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인가?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와 성도들에게 원하시는 바가 되겠는가! 교회와 성도들은 겸허한 마음으로 성찰(省察)해 봐야 할 시간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개국 이래로 가장 잘 사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한국 교회의 부흥은 기독교 2천 년 역사에 그 유례가 없을 만큼 빛나는 일이다.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올려 드려야 마땅한 일이다. 36년 간이나 나라의 주권을 잃고 일제 식민 통치 아래서 신음(呻吟)하며 살았다. 우리가 해방되고 곧바로 동족 간의 끔찍한 전쟁을 겪었다. 지금의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불구하고 우리는 배은망덕(背恩忘德)하니 두려운 생각이 든다.
교회가 극단적인 정치 이념에 매몰되면 불행한 일이다. 교회는 시대의 양심이 되고 등불이 되어 중심을 바로잡아 줄 수 있어야 한다. 교회가 극우나 극좌의 정치 이념, 어느 한편을 들어 광장(廣場) 정치를 꾀하면 안된다. 목사가 어느 한편의 정치 이념을 강요하거나 선동하면 안되는 일이다. 각기 신앙과 양심과 성향에 따라 판단하도록 해 줘야 한다.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거의 모든 교회가 히틀러를 지지했다. 본회퍼 목사 중심의 고백 교회만이 비판하고 저항했다. 독일의 교회, 지식인, 언론은 히틀러의 광기(狂氣)에 대해 침묵했다. 하나님 앞에 범한 허물이었다. 전후(戰後)에 그 후유증은 컸다. 우리 한국 교회와 성도는 역사적 교훈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 교회 상황은 날로 그 본질과 정체성을 상실해 가고 있다. 극소수이긴 하지만 교회가 극단적으로 정치 세력화 되어 간다. 십자가의 참 뜻을 잃어가고 있다. 극우, 극좌에 치우치는 교회의 정치화(政治化)는 십자가 신앙을 놓치게 되고 교회의 부패와 쇠퇴를 가져오게 될 것이 뻔하다. 예수님께서는 로마 권력에 대항하a지 않으셨다. 사도들도 로마 제국과 투쟁하지 않았다.
지금은 극단적 정치 이념에 매몰된 기독교인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극단적이고 더 사나워 보인다. 이리가 아니라 표범이나 사자처럼 변하고 있다. 정치적인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방에 대해 적개심(敵愾心)을 가지거나 저주하면 되겠는가? 진정한 기독교는 악을 선이라 부르지 않고 선을 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있는 사실 그대로를 보고 말한다. 정치적 견해의 차이 때문에 내 편, 네 편으로 편 가르기 하는 데 교회가 앞장 서면 되겠는가? 어려운 시대를 사는 성도는 선(善)한 열매를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