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산책] 친정어머니의 「비니루」 목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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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겨울이었습니다. 시장 어귀에 줄줄이 늘어선 좌판들 틈에 어머니의 생선가게가 있습니다. 가게라지만 사실 바람막이하나 없는 길목에 생선박스를 내려놓고 오늘도 힘껏 소리치십니다. 어머니는 ‘탁탁탁’ 생선을 토막 내어 손님들에게 팔았습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생선을 두어 상자씩 받아다 팔아 자식 다섯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셨습니다.

“한 마리 사! 싸게 줄게! 고춧가루 팍팍 풀고 맛나게 끓여 드셔!” “아주머니 많이 파세요.” 단골이 하나씩 둘씩 늘어났지만 궁색한 형편을 벗어날 순 없었습니다. 추운 겨울 길거리에서 어머니를 따뜻하게 해줄만한 것은 연탄모양으로 생긴, 속칭 ‘연탄의자’뿐이었습니다. 당신께서는 그렇게 변변한 외투 하나 없이 한데서 겨울을 났고 감기가 떨어질 새 없었지만 자식들 앞에선 조금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궁상맞은 나날을 지켜보는 게 끔찍이도 싫었던 나는 서둘러 결혼을 해서 집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를 오랫동안 찾지 않았습니다. 사느라 지쳐 정말 오랜만에 시장바닥의 어머니를 찾아갔던 날, 어머니는 오랜만에 찾아온 딸을 괘씸타 않으시고 기쁘게 맞아 주셨습니다. 

“아이구, 이 추운 날, 네가 어쩐 일이냐?” 그때 옆에서 지켜보던 아주머니가 한마디 거들었습니다. “아따, 딸만 춥고 엄마는 천하장산감?” “에이! 원 별소리를 다하네.” 옆 가게 아주머니의 말씀에 어머니는 손을 휘휘 내저으시며 손사래를 치셨습니다. 그 말에 처음으로 어머니의 옷차림을 찬찬히 뜯어본 나는 그만 목이 메었습니다.

“엄마… 목에다 왜 「비니루」를?” “니가 몰라서 그러지 바람 막는 데는 「비니루」가 최고다.” 어머니는 생선을 담아 파는 「비니루」 한 장을 목에 단단히 묶어 매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생활이 힘들다는 이유로 목도리 하나 사드리지 못한 내가 부끄럽고 한심해서 얼굴을 들 수 없었습니다. 나는 그 길로 가서 털목도리를 하나 샀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달려가 털목도리를 목에 둘러 드렸습니다.

“돈도 없는데 뭐 하러 이런 건?” 그 작은 털목도리 하나에 어머니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습니다. “엄마, 딸이 설마 목도리 하나 살 돈 없을까!” 그날 나는 생선비린내가 밴 어머니의 「비니루」 목도리를 손에 꼭 쥔 채 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사는 게 힘겨울 때마다, 그리고 좋은 집, 좋은 옷, 맛난 것이 그리울 때마다, 나는 욕심을 덜어 내기 위해서 「비니루」 목도리를 꺼내보곤 합니다.

옛말에 “「내리 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은 흔하지만,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기는 좀처럼 어렵다는 말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스승이 제자를 사랑하고, 상관이 부하를 사랑하는 것이 사랑의 순리(順理)라고 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사랑을 받고 살지요. 그런데 사랑이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내리 사랑」이 자연스러운 특성인가 봅니다. 제자가 스승이 되면 자신의 제자에게 「내리 사랑」을 베풀게 되고, 자식이 부모가 되면 자기 자식에게 「내리 사랑」을 아낌없이 주게 되지요. 아마도 그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의 법칙이요, 흐름일 것입니다. 

연전에 미국 서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치매에 걸린 칠순의 어머니를 「라스베가스」에 버린 비정한 한인 아들 이야기가 매스컴에 보도된 적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노모(老母)는 어떤 마음씨 좋은 사람의 도움으로 로스엔젤레스에 있는 한인 경찰서까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자초지종(自初至終)을 알게 된 경찰관들이 그 나쁜 아들놈이 어디에 사는지 어머니에게 다그쳐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어머니는 자식을 보호하려고 “자신이 길을 잃어버린 것이지, 아들이 버린 것이 아니라”고 같은 말을 되풀이 했다고 합니다. 자식을 끝까지 변호하려는 어머니의 「내리 사랑」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게 됩니다. 

「내리 사랑」이 ‘본능(本能)’이라면 「치사랑」은 ‘도리(道理)’라 하겠습니다. 「치사랑」은 의식적인 노력과 수고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평소에 자식 된 ‘도리’를 잃지 않도록 마음을 모아 다짐하며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문정일 장로

<대전성지교회•목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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