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제중원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의 틈바구니를 타고 1884년 미국 공사관 공의로 알렌 의료선교사가 내한한다. 그해 12월 갑신정변으로 황후의 측근 민영익이 13번씩이나 칼에 찔려 중태에 빠진다. 알렌이 서구적 외과 수술 등으로 민영익을 살리자 왕실에서는 알렌을 “하늘에서 내려온 의사”라며 감탄을 보낸다.
알렌은 왕실 시의로 임명되자 한국 땅에 서양식 병원 설립을 제안했고 1885년 4월 10일 광혜원 설립을 허락받았고 12일 뒤 ‘중생을 구하는 집’- 제중원으로 이름이 바뀐다. 제중원은 정부와 선교부가 함께 공동 운영하는 병원으로 운영이 된다. 제중원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다.
안식년을 보내던 언더우드는 1892년 캐나다를 방문, 강연을 이어가던 중 에비슨(Oliver R. Avison)을 만나 교제하며 그를 한국 선교사로 오지 않겠느냐고 제안한다. 이때 감리교 신자였던 에비슨이 감리교의 파송을 받지 못하고 미 북장로교 의료선교사로 파송받아 내한한다.
제중원 원장으로 취임한 에비슨은 정부의 잘못된 간섭과 전횡 등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1894년 정부로부터 독립, 미 북장로교 선교부 전적 소속으로 제중원을 운영하게 된다. 그리고 1899년 미국으로 들어가 미국 클리블랜드 부호 세브란스를 설득, 병원 설립 비용으로 1만 불을 봉헌 받아 서울역 앞 땅에 병원을 건립하고 제중원을 세브란스 병원으로 부르기 시작한다. 1904년엔 다시 세브란스를 통해 의사 양성학교, 병원, 의학교 건립비용 3만 불을 기부받게 된다.
이때부터 에비슨은 연희전문과 세브란스 의학교를 통합, 대학설립을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마펫 등 평양 측 선교사들은 숭실대로 충분하다고 반대해 언더우드가 별세할 때까지 무려 10년 이상 이 꿈을 이루지 못한다.
II. 연희전문
초기 한국선교는 교회, 병원, 학교 3사역으로 이루어졌다. 그중 교육 사역에서 당시 한국 사회는 서당(초등), 향교(중등), 서원(사립 중등), 성균관(대학)이 있었다.
1886년 육영공원이라는 선교사들이 영어로 교육하는 근대식학교가 시작되었다.
사실 초기 선교사들 대부분은 의료선교사 아니면 언더우드, 아펜젤러, 헐버트 등 모두 교육선교사의 자격으로 내한을 했다.
1886년 언더우드는 정동 자신의 사택 옆 작은 건물을 얻어 고아원 형식의 숙식, 공동학습생활을 하는 ‘언더우드 학당’을 개교한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한문을 공부하고 예배를 드리고 아침 식사 후 영어, 성경, 수학, 역사, 지리, 과학, 음악 등 다양한 공부를 했다. 1901년엔 게일을 교장으로 하는 연지동 중등학교를 세우고 ‘깨우쳐 새로워진다’는 의미로 경신학교라 부른다.
(다음 편에 계속)
류영모 목사
<한소망교회•제 106회 총회장•제 5회 한교총 대표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