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저일 생각하니]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 믿음 본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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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원자탄으로 존경받는 손양원 목사님은 1902년 6월 3일 3·1운동 애국지사 아버지 손종일 장로와 믿음 독실한 어머니 김은수 집사의 장남으로 경남 함안에서 태어났다. 고향 칠원보통학교 다닐 때부터 손양원 목사님은 일제의 신사참배 반대의식이 강했다. 마산창신학교 서울 중동중학 일본 수가모중학 등에서 교육을 받았다.

1924년 22세 때 19세 정양순(본명 정쾌조)과 결혼 3남3녀를 두었다. 1929년 3월 경남성경학원 졸업 후 부산 근처에 남창교회 양산에 양산교회 원동교회를 개척 목회 활동을 했다. 1935년 평양신학교에 입학 1938년 졸업했다. 신학교 재학 중 1937년 여수 애양원 교역자로 활동하며 특히 나환자를 극진히 돌보았다. 일사각오의 주기철 목사를 존경하며 일제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앞장섰다. 1938년 9월 10일 제27회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고 국민의식이라는 일제의 설득에 동조해 신사참배 안건이 통과되었다. 부총회장 김길창 목사는 23명의 목사들을 이끌고 평양 신사참배를 했다. 여기에 주기철 목사를 비롯 한상동 한부선 주남선 이인재 이기선 목사 등이 반대투쟁을 벌였다. 손양원 목사님은 신사참배를 적극 반대해 일제 경찰에 체포되고 1년 6개월의 옥고를 광주구치소에서 겪었다. 미전향 죄수로 감시를 받다가 광복을 맞았다. 애양원 나환자를 돌보고 있던 때 1948년 10월 19일 육군 3연대 남로당이 여수순천반란사건을 일으켰다. 이때 공산청년 안재선이 기독청년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 동신 동인이를 총살했다. 갑자기 사랑하는 두 아들의 죽음이 큰 비극이었으나 깊은 기도 끝에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안재선 사형수를 양아들로 삼았다. 안재선을 취조하던 경찰이 위대한 목사님으로 감동했다. 원수까지도 사랑한 손양원 목사는 9가지 감사를 말해 사랑의 원자탄 목사로서 교계와 사회에 거울같은 믿음의 본을 보여준다. 1) 나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을 나게 하시니 감사 2) 허다한 많은 성도 중에서 이런 보배를 나에게 주셨으니 감사 3) 3남 3녀 중에서 가장 귀여운 맏아들 둘째 아들을 바치게 하시니 감사 4)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이 함께 순교했으니 더욱 감사 5) 예수 믿고서 와석종신(臥席終身)해도 복이라 했는데 전도하다 총살 순교했으니 더욱 감사 6) 미국 가려고 준비하던 아들이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내 마음이 안심되어 더욱 감사 7) 내 아들을 죽인 원수를 회개시켜 아들을 삼고자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8) 내 아들의 순교의 열매로서 무수한 천국의 열매가 생길 것을 믿으며 감사 9)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이길 수 있는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이렇게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는 공산청년에게 아들을 둘이나 함께 잃었으나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하나님 말씀을 철저히 실천하셨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을 으뜸으로 내세웠다.

이 하나님의 근본적 본질적 사상인 사랑의 실천을 손양원 목사님은 잘 나타낸 것이다. 이런 사랑의 실천사상에 영향을 끼친 분은 손양원 목사님 아버지 손종일 장로님과 일사각오 믿음을 보인 순교목사 주기철 목사님 영향이 큰 것으로 생각된다. 백범 김구 선생 별세 3개월 전에 손양원 목사님은 백범이 전한 한시 답설야중거(踏雪夜中去) 오언절구(五言絶句) 한편을 받고 사랑의 격려말씀도 들었다. 1950년 9월 28일 해병대의 수도탈환작전으로 서울이 수복된 날에 여수에 남은 인민군들 총살로 손양원 목사님도 순교했다. 위대한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 기도와 믿음과 그 삶의 모습을 물질 권세 명예가 설치는 오늘의 사회 속에서 목회하는 목사님들이나 평신도들이 다 잘 본받아야 할 것이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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