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여정] 지역 주민과의 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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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난 충청북도 보은은 그 유명한 우리나라의 천년고찰 법주사가 안주한 곳으로 당시 뿌리깊은 불교적 문화의 영역이었다. 당시 어머니께서는 스님들이 공양을 오시는 날이면 그 바쁜 와중에서도 그냥 돌려보내는 일이 없었다.

꼭 당시의 적당한 시주거리를 정성으로 마련해 스님과 합장하는 것을 어릴 때부터 인상 깊게 보아왔었다.

그럴 때 하나 잊혀지지 않는 것은 많은 스님들이 나를 보시고는 “고놈 참 영특하게 생겼구나”, “후제 큰 벼슬이나 하나 하겠구나”, 혹은 “재상감은 족히 될 아이야”, 이런 덕담을 어머니 앞에서 많이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마다 쑥스럽고 별생각 없이 하나의 칭찬의 말씀으로 들었지만 그때마다 어머니께서는 참으로 밝은 모습으로 좋아하시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시골장날이나 읍내에 볼일이 있어 나가시는 날이면 걸인이나 동냥거리를 하는 사람들 보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이 꼭 지전 한 푼이라도 쥐어주며 “열심히 사세요”, “건강하세요” 하는 격려의 말씀을 아끼시지 않는 성품이셨다.

이런 어머니의 각별한 마음을 일찍부터 보아온 터인지 당시부터 나는 빈곤한 자나 마음 불쌍한 자를 보면 말할 수 없는 연민과 걱정을 함께하는 동정심을 갖고 있었다.

저들의 가난과 힘든 고통이 무엇으로 인한 것인지 또 저렇게 근근이 하루를 연명하는 분들의 참담한 마음과 그분들 가족들의 삶을 헤아리며 운명적 숙명적 인간관계와 어떤 후천적 재앙을 숙고해 보며, 그날은 우울한 마음으로 지나곤 했다.

내가 만약 저분들을 도울 수 있는 입장과 위치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의 동정심은 어느덧 내 마음 속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다.

드디어 지방자치제가 실시되고 제1기 구의회에 진출해 마침내 의장이 된 1991년, 제일 먼저 현장 확인을 간 곳이 관내의 달동네였다. 일부러 동행 없이 오후 느지막이 관내의 현황도 파악할 겸 민심도 살필 겸 일부러 지역 주민에게 소외감을 주지 않으려 가벼운 산책 차림으로 나섰다.

변두리인 이곳은 당시만 하더라도 문명 문화와는 거리가 먼 먹고 살기에도 벅찬 낙후된 동남아의 어느 도시나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는 아프리카의 빈한한 마을과 조금도 다를 게 없었다. 우선 주민들의 빈곤한 생활과 열악한 환경이 나의 눈을 의심케 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국민 소득이 중진국 수준에도 못 미치고 있는 시절이었지만 이곳은 그나마 가장 기초적인 생활환경을 비롯한 도로시설과 위생시설마저 엉망이었다.

대다수의 주민들이 하루 벌어 하루를 근근이 먹고사는 처지의 사람들이라 내일의 희망이나 꿈은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을 하고 있어 너무나 안쓰러웠다. 더구나 환경은 더욱 열악해 곳곳에 쓰레기나 오물로 코를 찌르는 악취가 넘쳐나 구토가 날 지경이었다. 참으로 거리의 모습은 목불인견이었다.

그리고 곳곳에 쌓인 쓰레기더미 속을 넝마주이인 듯한 몰골이 비참한 사람들이 더러운 작업복 차림으로 맨손으로 고물나부랭이를 수집하고 있었다.

여기가 과연 사람 사는 곳이고 우리나라 제2의 도시인가 싶을 정도였다. 더구나 행정과 치안이 과연 미치는 곳인가 싶을 만큼 동네 골목마다 쓰레기와 흙더미들이 쌓여 초라한 모습의 아이들이 마구 뒹굴며 놀이터가 되고 있었다.

나는 깊은 한숨과 함께 좁은 의지인의 냄새를 풍기며 어떤 소식이 끊긴 친구를 수소문한다며 주변의 허름한 구멍가게를 찾아서 음료수 한 병을 시켜 먹었다. 마침 동년배나 됨직한 피골이 상접한 노인네 두 분이 과자를 안주삼아 소주병을 기울이고 있었다. 가난에 찌든 노인의 꾀죄죄한 모습들이 더없이 안쓰러웠다.

나는 우선 소식이 끊긴 친구를 오랜만에 수소문하러 왔다고 둘러대며 한껏 예의를 갖추고 “어르신들 동네가 너무 지저분한데 청소차가 안 옵니까?”하고 물었다.

술잔을 나누던 노인들은 갑자기 화를 벌컥 내며 무슨 감정이라도 있는 듯, “여기가 어디 사람 사는 뎁니까” 하면서 나를 째려보며 “청소차는 불규칙하게 가뭄에 콩나듯 가끔 오는데 대강 큰 길거리만 치우고 그만 떠난 답니다.” “어쩌다가 동네 쓰레기를 겨우 치우는 정도지요.” 그러면서 자주 민원도 넣어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를 경계하듯 한참을 아래 위를 훑어보는 것이 아닌가. 얼마 후 나의 순수한 모습을 보고는 한껏 경계를 푼 듯한 말씀으로 그리고는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일용직과 날품팔이들이 대부분 거주하고 있다는 곳이란 점과 인생 비전이나 미래의 희망 같은 것은 아예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힘없는 곳이며 그나마 길거리에서 노숙하는 걸인풍의 사람들도 적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렇게 못살다 보니 좀도둑이 많다는 것이다. 사실 그때만 해도 국가재정이 말할 수 없이 어려운 때라 적재적소에 주민을 위한 행정이 골고루 미치지 못할 때였다. 또한 정부 각 기관에 각종 비리와 부정부패가 만연해 중앙정부도 골머리를 앓던 시대였다.

양한석 장로

• 문현중앙교회

• 시인 

•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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