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기록된 도시나 지명들 중에 오늘날까지 원형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은 없다. 모두 땅 밑에 묻혀 있다. 발굴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래서 고고학이 발달했고, 오늘날도 고고학자들은 땀을 흘리며 발굴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도 마찬가지이다. (‘갈대아’는 메소포타미아의 최남부 지역을 지칭한다. 또한 갈대아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지칭하기도 한다. 따라서 갈대아 우르라고 하면 ‘갈대아 지역의 우르’라는 뜻도 되고, ‘갈대아인들이 사는 우르’라는 뜻도 된다.) 갈대아 우르는 적어도 5천 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고대 도시로서 주전 3천 년경부터 ‘수메르 문명’을 꽃피웠던 중심 도시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지난 2천여 년 동안 우르는 땅속에 파묻혀 있어 그 위치조차 잊혀진 망각의 도시가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1855년 영국인 테일러(J. E. Taylor)가 이라크 남부 지역의 총영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는 끝없이 펼쳐진 평야 지대에 약간 솟아오른 둔덕 지역에 흥미를 갖게 되어 사람들을 시켜 그 둔덕 지역의 한 모퉁이를 발굴하게 했다. 땅을 파고 들어가자 놀랍게도 고대 문자인 ‘쐐기 문자’로 기록된 많은 토판 문서들이 출토되었다. 흥분한 테일러는 그 토판 문서들을 영국의 고대어 전문가에게 보냈다. 토판 문서의 내용이 판독되었을 때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그곳이 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였던 것이다. 수천 년 동안 땅속에 파묻혀 있던 ‘우르’는 이렇게 우연히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러나 우르가 고고학자에 의해서 정식으로 발굴되기까지는 70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1922년 영국인 고고학자 레오날드 울리(Leonard Woolley)는 발굴단을 이끌고 우르에 도착했다. 이로부터 13년 동안 울리는 그곳을 발굴하는데 시간을 바쳤고 오랫동안 땅속에 감추었던 우르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게 되었다. 고고학자 울리는 우르의 발굴에서 무려 16개의 황실 무덤을 발굴했다. (울리는 우르의 발굴 공로로 영국 왕실로부터 작위를 받았다.) 서기전 2500년 것으로 추정되는 왕실 무덤에서는 엄청난 분량의 부장품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들은 고도로 발달된 고대 우르 문명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순금으로 만든 단검과 왕실 집기(什器)들, 금과 은 합금으로 정교하게 만든 투구, 여자들이 사용했던 각종 귀금속 장신구들, 여러 가지 종류의 악기들…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낸다. 우르의 역사에서 최전성기는 서기전 21세기 때 우르남무(Ur-Nammu) 왕 때였다. 그는 건축 왕이었고, 그 일부가 그대로 남아있는 거대한 지구라트(Ziggurat)를 세웠다. 창세기에 나오는 바벨탑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구조물이다.
필자가 불원천리하고 요르단을 거쳐 이라크까지 가서 바그다드에서 400km를 달려 우르 지역에 도착했을 때 실망스럽게도 우르의 유적지에는 접근할 수 없었다. 이라크의 군대가 그곳에 군사시설을 만들어 놓고 일반인의 접근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우르에 있는 인류문화유산을 누구도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잔꾀를 내어 그곳을 군사적 요충지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고생 끝에 멀리 우르까지 와서 철조망 너머로 멀리 우르의 유적지를 바라보아야 하는 난감한 상황이 되었다.
박준서 교수
<피터스목사기념사업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