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본 삶의 현장] 불가항력적인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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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 일본인 교사가 중·고등학교에서 물러난 후 특히 수학·물리를 가르칠 교원의 부족을 느끼자 국가는 대학에 부설로 중등교원양성소라는 것을 개설하였다. 나는 그곳에 1953년 입학하였다. 정확히 말하면 그 명칭은 전남대학교 부설 중등교원양성소였다. 소장은 전남대학 총장이었고 교수들은 대학에 출강한 강사들이었다. 그중에 국어에 김현승, 수학에 하광철 교수 등이 계셨다. 나는 당시 불신자였는데 후에 하나님께서는 불신자를 이런 방법으로 초청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한다. 그것은 내가 그 양성소의 마지막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졸업하고 이 학교는 폐교되었다. 아무 생각 없이 들어 왔지만, 이 학교는 나를 위해 폐교를 일 년 미루고 있었던 것 같다. 그 학교는 대학이라고 인정해 주지도 않은 곳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겪을 것은 다 겪었다. 당시 대학마다 있었던 학도호국단은 군사훈련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대학생들을 일제히 군에 입대 시켜 정식 훈련을 마치게 한 다음 예비역으로 편입한 후 다시 대학에 복귀시킨 일이 있었다. 그때 우리는 대학생이면 으레 쓰는 사각모자도 쓰지 못하고 앞으로 선생질하러 온 애들이라고 대학 사회에서는 열외 취급하던 때였는데 당당한 대학생으로 4년 졸업생들과 함께 군에 입대하게 된 것이다. 1954년 7월부터 9월까지 3개월간 논산 훈련소에 입소했는데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는 이발사들은 ‘대학생 놈들’이 입영했다고 머리를 박박 밀면서 환호성을 올렸었다. 대학에 못 가고 억울하게 군대 생활을 하던 분풀이를 한 것이다. 그 당시 학도병에게 주어진 특수 군번이 so 군번인데 후에 흔히 so를 빼고 00으로 시작하는 ‘빵빵’ 군번이라고 불렀다. 나는 제1기 학도특별군사훈련생으로서 간부 후보생 전반기 훈련을 수료했다는 수료증서와 함께 보병학교장 서종철 준장이 수여한 제대증을 가지고 학교에 복교했다. 이때 내 군번은 so000009번이었다. 나는 1학년을 마치고 예비역으로 편입되어 2학년으로 올라갔다.
이 해는 학교가 폐교되는 마지막 학년이었다. 나는 겨울 방학이 되자 이 학교 마지막을 장식하는 잡지 <중교(中校)>를 편집하느라 시간을 보냈다. 조선대학의 국문과 장용건 교수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나는 정비석 씨가 지은 소설작법도 읽었지만, 조선대학교 장 교수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게 해 준 분도 그분이었다. 나는 전남대학에 다니는 학생들과 <월요 동인회>를 조직해서 월요일 저녁에는 함께 모여 작품을 발표하고 서로 토론하였다.
그때 동인 중 문단에 등단한 사람은 박춘상밖에 없었고 평론을 열심히 쓰던 김중배가 대학 졸업 후 한국일보 기자로 신랄한 글솜씨를 보여주더니 동아일보 논설위원, MBC 사장 등을 거쳐 지금은 노년에 언론광장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나는 그에게는 속물이라고 찍힌 놈이다.
중교를 졸업하자 곧장 소집영장이 나와 군에 입대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예편시켰을 때 국가에서 처음 약속했던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나는 졸업하자마자 입대는 너무 억울하다고 생각하여 전남대학 3학년 화학과로 편입하였다. 그러나 화학 공부보다는 글쓰기를 좋아해서 그해 6월 대학신문 주최로 개교기념 제1회 전국대학생 작품 현상 모집에 단편소설 <초련기(初戀記)>로 가작에 입선되었다. 전국 대학생들이 응모한 것이어서 나는 그것도 자랑스러웠다. 그래 어떻게든 대학에 머물러보려고 군 기피 생활을 하다가 11월에 자진 입대하였다. 아무리 피해도 나의 갈 길은 군대였다. 먼 훗날 예수님을 받아들인 후 나는 하나님의 뜻이 따로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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