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에 일간신문과 인터뷰하면서 이어령 선생이 피, 땀, 눈물을 말씀하셨다. 사람들이 피와 땀으로 무엇을 이룰지라도 마지막으로 이기는 것은 눈물 즉 박애의 정신이라는 뜻이었다. 가위, 바위, 보도 언급했는데 바위 즉 주먹을 이기는 것은 보(자기) 즉 포용이라는 말씀이다.
자라오는 동안 가위바위보를 하면서 어느 것도 절대적인 강자일 수 없다는 이를테면 힘의 순환 같은 것을 어렴풋이 느꼈는데, 이어령 선생은 가위와 바위는 투쟁과 경쟁이고 거기서 이긴 바위 즉 주먹은 보자기에 싸여 사라지고 만다는 것을 일러주신다. 보자기는 다시 가위를 만나면 찢기지만 이 힘의 순환이 보자기에서 끝나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의 변천을 보면 혁명이나 전쟁으로 피를 뿌려 국가사회의 새 질서가 형성되면 백성들은 땀 흘려 나라를 건설하고 눈물 즉 평화와 박애의 시대가 펼쳐진다. 이러한 순환은 길거나 짧은 주기로 반복되는데, 이 틀에서 우리 사회가 지금 어디쯤에 와있는가를 생각할 때 오늘의 권력이 박애(fraternite)를 미루는 듯해서 안타깝다.
프랑스혁명이 1789년 자유, 평등, 박애의 기치를 들고 일어나 공포정치로 많은 피를 흘리고 이어 나폴레옹이 집권한 후 공화제와 왕정이 오락가락한 다음 보·불전쟁 패배로 1870에 공화정이 자리잡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대한민국에서 80년대 시민운동의 결과 민주화가 성취되었다고 믿었지만 작금의 상황을 보면 격화되는 좌우의 당쟁 속에서 민주질서를 향한 진통이 아직도 진행 중이라는 느낌을 갖는다.
고대로부터 철학자들이 보았듯이 인간의 의식은 상하, 전후, 좌우, 빛과 어둠의 2원적 인식에서 출발해 3원적 사고로 발전했다. ‘피와 땀과 눈물’도 그런 사유의 소산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기본 틀이 세워지고 그 위에 믿음, 소망, 사랑의 실천적 내용이 완성되었다. 사랑으로 구원에 이르는 도정에서 인간은 수없이 피, 땀, 눈물의 순환을 거듭한다.
코로나 사태 1년을 지내오면서 많이들 철학자가 되었다. 고통과 불편 속에 사람들의 눈물이 마르고 비대면 활동이 지속되면서 인성이 협력과 의존보다 개인주의, 고립주의를 키우지 않았을까 우려한다. 그리고 그동안 교회로부터 물리적으로 떨어져 주일을 보내고 부활절, 감사절, 성탄절을 보낸 교인들이 사태가 진정되면 과연 교회로 다시 몰려올지를 걱정한다. 그럴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는 전자를 믿는다.
교회에서 사랑의 샘물을 맛본 사람들에게 갈증은 날로 심해졌다. 혹시 그런 경험을 아직 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교회의 끌어들이는 힘은 미약할지 모른다. 또한 코로나의 고통 속에서 직접적인 건강상의 위험을 당하고 생활고를 겪거나 하면서 기도에 아무 응답이 없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걱정을 물리치는 다른 생각이 있다.
6.25의 한계상황을 체험한 우리 백성들이 전쟁 후 60년대, 70년대를 통과하면서 개인과 국가의 재건에 몰두하는 중에 영적인 안식을 찾아 대 부흥을 이룬 것을 우리가 모두 기억한다. 그것은 피, 땀, 눈물의 과정이었다. 코로나 사태 속에 교인들에게서 에코(Echo)가 없는 비대면 예배를 진행하면서 교역자들의 사명감과 영적 능력은 배가되었다. 이제 고난으로부터 해방되는 사람들을 교회가 사랑의 빛과 온기로 한아름 가득히 안을 것이다.
김명식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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