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정의 개종은 일본에 온 다른 한국인들을 향한 직접 전도와 미국에 대한 한국 선교 호소,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인 성경의 번역으로 전개되었다. 그는 구원받은 감격으로 한국 유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첫 사람은 손봉구였다. 그에게 성경을 가르치니 ‘이수정이 그의 신앙 때문에 사형 당한다면 나도 죽을 각오이다’라고 했다. 그의 숙부가 40년 전 천주교 박해 시(병인교난) 순교했다. 두 사람은 6월 24일 한문 요리문답서를 교재로 주일학교를 시작하자 발전하여 선교사들이 성경을 가르치는 성경연구회로 확대되어 주일마다 설교자를 초청하여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1883년 가을에 이수정이 주재하는 한국인 주일학교가 발족되었고, 1884년 동경에 최초의 한국인교회가 설립되었다.
유학생 중에 세례 받고 신학교에 입학한 김익승과 박명화가 있었고, 그 외에도 일본에 체류 중이던 개화파의 이동인(李東仁), 김옥균(金玉均), 홍영식(洪英植), 서광범(徐光範), 서재필(徐載弼) 등을 미국인 선교사 낙스와 맥클레이에게 소개하여 서구 지식을 배우게 했다. 또한 윤치호(尹致昊) 등이 전도 받고 교회에 나왔다.
이수정은 1883년 11월 25일 칠일잡보에 “미국 잡지들에 한국선교를 요청하는 글들이 게재된 것”이다. 그는 낙스 선교사에게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면 “저는 비록 영향력이 없는 사람이지만 여러분이 선교사들을 파송만 해 준다면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간곡하게 바라는 바는 지금 당장이라도 몇 명을 이곳 일본에 보내 여기서 일하고 있는 이들과 협의하면서 사업 준비를 하도록 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안전하고도 적절한 방법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제 기쁨은 한이 없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종, 이수정 드림”이라고 했다. “만일에 미국 교회가 이 호소를 들어주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길을 통하여 한국에 선교사를 보내 주실 것이다”라고 했다.(세계 선교 평론)
당시 일본 교회에서는 한국선교론이 대두되어 한국선교사를 지원하는 자까지 나오는 분위기였는데 이수정은 강력히 반대했다. 한일 간의 감정도 있었지만 서구문명을 직접 받고자 했다. 그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을 기뻐한 사람은 미국 선교사들이었다. 일본에 있는 선교사들이 조선에도 선교할 마음을 가졌으나 천주교 박해와 쇄국정책 때문에 못했다. 그런데 이수정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으니 조선에 선교의 기회를 모색하려 했다. 그런데 그가 학자란 것을 알고 일본 주재 미국 성서공회 총무 루미스(H. Loomis) 목사가 기뻐했다. 루미스 목사는 이수정에게 성경번역을 제의했다. 루미스 목사는 금지된 나라에 복음을 전하는 최적의 방법이 그 나라 말로 <말씀>을 담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루미스 목사는 이수정에게 번역 방법과 요령을 알려주었는데 우선 한문 성경을 정독하라고 하였다. 한문과 한글만 아는 이수정이었지만 번역하는 가운데 자연히 일본성경이며, 영어성경, 그리고 루미스의 지도로 희랍어까지 배우게 되었다.
이수정은 1883년 여름부터 번역을 시작했다. 한문으로 된 마가복음을 대본으로 하되 일본어, 영어와 헬라어 원문을 대조하면서 번역하였다. 이 번역에는 만주에서 번역된 <예수 셩교젼셔>와는 달리 국·한문 혼용체를 사용하였고 고유명사 표기는 원어에 가깝고 한문 투의 용어가 많다. 하나님을 ‘天主’로 번역하였다. 천주는 천주교도들에게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사용했다. 그 밖에 세례는 ‘밥테슈마’로, 그리스도는 ‘크리슈도스’로 음역하여 헬라어 원문에 충실하였다. 먼저 한국의 양반식자층을 의식했다. 그래서 마가복음서를 ‘신약 마가 젼 복음셔 언l’라고 한 것은 유교와 불교 계통 서적의 한글 역을 ‘언l’라고 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특히 이수정의 동료 중 이동인(李東仁)이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므로 그는 이수정의 성경 번역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