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포럼] 김일성의 승용차, 서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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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때 후퇴와 북진을 반복하면서 피아간의 많은 전리품들이 발생했다. 그중에 최고의 관심사는 국보급 문화재나 역사적 가치가 있는 희귀품 자료들이다. 김일성이 사용하던 승용차라면 더없이 가치가 귀한 전리품이다. 국군과 유엔군이 8월 1일부터 한 달 반 동안 낙동강 방어선을 굳게 지키고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총반격에 나선 국군과 유엔군은 10월 1일 38선을 돌파하고 10월 19일 평양에 입성함으로써, 남침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겼던 아픔을 딛고 우리 국민의 한(恨)을 풀어주었다.
사기충천한 국군은 북진의 속도를 더 빠르게 재촉하여 10월 22일 청천강에 도달했고 10월 26일에는 드디어 국군 제 6사단이 압록강까지 진격하여 초산(楚山)에 태극기를 꽂고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는 순간에 통일은 눈앞에 다가온 것 같았다. 바로 그때 극적으로 나타난 중공군….! 통일을 방해한 철천지원수가 되는 순간이었다.
6사단 7연대가 평양을 지나 청천강에 이르렀을 때, 강가에 버려진 고급승용차를 발견하고 노획했다. 김일성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차 주인이 누구인지 몰랐다. 6사단의 한 장교가 노획한 승용차를 몰고 평양 시내를 들어가자 평양 시민들은 즉시 ‘김일성의 차’라는 사실을 알아보고 김일성을 잡았냐고 묻는 과정에서 김일성이 버리고 달아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선물한 소련제 리무진이였다.

이런 사실이 국방부를 통해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됐다. 대통령께서는 낙동강 방어에 공이 큰 미 8군사령관 워커 장군에게 선물로 주려고 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워커 장군이 12월 23일 의정부 근처에서 교통사고로 순직하는 바람에 본인에게는 전달되지 못하고, 그 대신 부인에게 주기로 했다. 1951년 7월 배편으로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부인에게 전달됐다.
부인께서 얼마동안 이 차를 운영하다가 차량 고장으로 다른 승용차와 교환했는데 그 이후 차량의 소재 파악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30년이 지난 1982년 10월 22일 부산항을 통해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국방일보 신인호 기자에 의하면 6.25 전쟁의 역사자료 수집 전문가인 지갑종 유엔참전국협회장의 노력으로 소재가 파악되고 돈을 주고 사왔다고 한다. 즉 지갑종 회장이 1981년 미국 참전용사들과 만난 자리에서 김일성의 승용차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소재 파악을 물은 적이 있었는데, 그 얘기를 귀담아 들었던 한 사람이 자동차 수집가들이 이용하는 전문지에 광고성 기사의 글을 실었고 그 기사를 보고 소유주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에 딱 맞는 말 같다. 지 회장은 차주를 만나 협상을 시작했다. 15만 달러를 요구한 것을 7만 5,000달러를 주고 반값에 사게 되었다. 차 값은 대우자동차에서 희사했다고 한다.

오래된 고물차라서 한국에 들여온 후, 러시아에서 차량 설계도면을 구해 삼성항공에서 11개월 동안 2억 원의 비용을 들여 원형대로 완벽하게 수리했다. 이 차는 스탈린그라드 회사가 제작한 8기통 4도어로서 7인승 지스(ZIS) 리무진이다. 처음에는 경남 사천 항공우주박물관에 전시했었으나 2013년에 전쟁기념관으로 이전하여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필자는 「6.25전쟁 진실알리기운동본부」에서 이사로 일할 때 전쟁기념관을 자주 들러 전시된 승용차를 여러 차례 본 바 있다.
김일성의 승용차를 서울(전쟁기념관)에 전시해 놓은 이유는 6.25전쟁의 뼈아픈 참상을 잊지 말고 다시는 ‘6.25와 같은 전쟁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온 국민이 힘을 합쳐 국가의 안보를 굳게 지켜야 한다는 교훈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특히 우리의 미래세대는 전쟁에 대한 경각심이나 관심조차 없기 때문에 어른들이 권고해서 많은 젊은이들이 가서 봤으면 좋겠다. 전쟁기념관에 가면 6.25전쟁뿐 아니라 우리 민족이 역사를 지켜온 ‘민족항쟁사’의 모든 것이 기록으로 전시되어 있다. 용산구 삼각지 국방부 앞.(4호선 삼각지역 11번 출구)

배영복 장로<연동교회>
• 한국예비역기독군인연합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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